고산 윤선도(1587-1671)는 17년 간의 귀양살이를 한사람이다. 그는 세번에 걸쳐 귀양을 갔다.
첫 번째 귀양은 그의 나이 30(1616)에 병진소를 올려 당시의 권세가인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갔다가
1618년에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가 되었다. 그리고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해배가 되었다.
두번째 귀양은 그의 나이 53세때. 병자호란때 강화도까지 간 그가 임금을 알현하지 않고 보길도로 숨었다 하여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1년간 간다. 1636년 2월에 그는 해배가 되어 해남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의 막둥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래서 쓴 한시가 도미아(막둥이를 애도함)이다.
막둥이를 애도함
막둥이는 내 천첩 소생 사내녀석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지극히 영특하여 내가 사랑을 쏟았다.
기묘년(1639년) 2월에 나는 영덕의 유배지로 부터 사면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20일 아침, 경주 땅의 요강원에 이르러
막내가 천연두를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 데 이 달 초하루에 죽고 말았다. 가슴이 너무나 아파 아무 생각도 못하다가
말 위에서 시를 지어 나의 슬픔을 쏟아 놓게 되었다.
貴賤分則殊 귀천으로 나눈다면 다를 지라도
父子情何異 부자의 정이야 어찌 다를 수 있으리
途中聞汝死 길을 가다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未哭心先悸 곡 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떨리네
我年四十六 내 나이 마흔 여섯에
슬하에 어린애 하나 얻어 기뻐했으니
눈과 눈썹 진실로 내 자식이었고
타고난 지능은 출중하기도 했네
겨우 서너살 되었을 때도
행동거지 내 뜻과 같았나니,
종이와 붓을 좋아 할 줄 알았으며
배와 밤 따위는 멀리할 줄 알았었다.
때때로 간략한 것을 가르쳐 주면
쉽게 배우고 기억도 잘 하였지
여섯 살 때 부터 나 바다로 들어가 보니
바다위의 선산은 깊기도 하였네
휘장친 수레 달리고 배 노젓 던 곳을
날 좇아가지 않는 곳 없었다네.
내가 앞뒤의 시내에서 노닐 때면
나보다 앞서 짚신을 엮어 주곤 하였지
나 홀로 석실에 깃들어 있을 때에는
날마다 찾아와 바위 사이에서 놀았으며
기이하고도 드높은 형상을 좋아하더니
신선의 비밀을 말 할 줄 알았다네
옛사람의 선행을 기쁘게 들어
나의 간략한 가르침에 불평하였고
더해 달라 소리치기에 이르러서는
등불 켜 놓고 밤에도 잠들지 않았다네
전년에 붙잡혀 가게 될 때에는
황망한 이별에 서로 버리는 양 했는 데
너는 내 말 곁에 서 있다가
채찍질 멈추게 하고 한번 바라보았지
이하 다음에 계속 됩니다.
(국역 고산유고 178-181)
채용신의 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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