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산 윤선도

해남군청에 소개된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 (1587~1671)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대부분 한문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어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과 시름과 흥, 원(願)을 시문(詩文)으로 풀어낸다. 고산은 본관이 해남으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다. 고산은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 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을 살지 못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당시는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 못 하였으며 광해군에 아첨하는 권세가 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의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 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지만 유배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는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출사의 꿈이 펴진다.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지금 경북 성주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1636년(인조14) 고산의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은 향리자제와 가졸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이때 배를 타고 남하하다 도착한 곳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다. 그는 이곳에서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샘과 돌이 참으로 아름다와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고 감탄하며 머물게된다.


이곳에서 고산은 격자봉 아래에 은거지를 정하고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지었으며 낙서제를 세우고 자연에 묻혀 어부사시사를 짓는 등 작품생활을 하는 생활의 터가 되며 임종시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땅이 된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이배 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제에서 향년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다.


고산은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의 생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으로 교차된 삶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문학적으로 매우 뜻깊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래서 그를 평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문학이다. 이러한 그가 평생을 통해 쏟아낸 엄청난 시구로 인해 한국의 국문학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윤선도는 그의 창작산실이 거의 유배, 은둔지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인 배경을 비롯 그 공간에서 처하게 된 동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산이 택한 은거지는 크게 현산면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였다. 현산은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야 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할 해중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 된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 만안리에 있는 금쇄동과 수정동, 문소동으로 이곳에서 약 10년을 번갈아 머물며 ‘산중신곡’ ‘금쇄동기’등의 작품을 쏟아냈고 보길도의 부용동에서는 일곱차례에 걸쳐 약 12년간을 풍류하며 살았다.


 

'고산 윤선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선도 시조- 견회요, 우후요  (0) 2008.02.16
고산 윤선도 인물 분석  (0) 2008.02.10
국문시조의 경지를 개척한 윤선도  (0) 2008.02.08
무궁화  (0) 2008.02.08
고산 윤선도  (0) 2008.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