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에서 (3)
김세곤 (노동부 부이사관)
앞글에서 기대승은 1558년 그의 나이 32세에 면앙정기 俛仰亭記를 지었다고 서술한바 있다. 그는 이 해 7월에 등과하여 승문원 부정자 벼슬을 받았고 동년 11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다 한다. 그리고 고향에 머무르면서 면앙공 송순의 부탁을 받은 면앙정기를 지었다. 그 증거가 바로 면앙정기의 글에 나오는 “지금 완산부윤(完山府尹=전주시장)으로 있는 송공(宋公)이 사는 집 뒤 뒤 끊긴 기슭의 벼랑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면앙정 俛仰亭이라 했으니 앞서 말한 바대로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완전하다는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이다.
그러면 면앙정기 나머지 부분을 살펴본다.
빈 정자 안에서 바라보면 그 시원한 모습과 우뚝 솟은 산세가 이어져 구불구불 하는 듯 하고 뛰어서 나오는 듯 하니 마치 귀신이나 이상한 물건이 남몰래 와서 흥취를 북돋아 주는 듯하다.
정자의 동쪽에는 제월봉이 있는 데 이 산은 우뚝 솟았으며 그 한 쪽 가지가 편편하고 구불구불하여 서쪽 큰 들에 임하여 이 삼십리 사이에 뻗쳐 있는 데 모두 여석구비이다. 정자의 뒷 산에는 동서남북 수백리 거리에 높다란 산이 겹겹이 쌓여 있다.
산 이름을 기록하자면 기암괴석이 높이 솟아 있는 산은 용구산(龍龜山)이요, 발돋움하여 우뚝 서 있는 산은 몽선산(夢仙山)이며, 기타 옹암(甕巖), 금성(金城), 용천(龍泉), 추월(秋月), 백암(白巖), 그리고 불대(佛臺), 수연(修緣), 용진(湧珍), 어등(魚登), 금성(錦城)산 등 여러 산은 마치 곡식 창고와도 같고 혹은 성곽(城廓)같기도 하며 병풍 같기도 하고 언덕과도 같으며 와우(臥牛)같기도 하고 마이(馬耳)같기도 하다. 이 모두가 눈썹처럼 검푸르기도 하고 상투처럼 뾰족뾰족하기도 하며 숨었다 드러났다 하기도 하고, 아득하게 보이다가 보이지 않기도 하다. 그리하여 형태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가 하면 기후는 겨울이 겨울 같지 않고 여름이 여름 같지가 않아 마치 기인(畸人=기이한 사람)이 요술을 부린 것도 같고 열부(烈婦)가 절개를 지키는 것도 같아서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오래오래 생각하도록 한다.
물이 옥천玉泉에서 근원하여 나온 것은 여계라고 하는 데 이 물이 바로 면앙정 뒤 기슭 앞을 감돌아 편편히 흐르는데, 물이 맑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는다. 마치 양양하고 유유하여 흘러가면서도 멈춰 있는 것 같고 저녁노을에 고기들이 텀벙거리고 가을 달빛 아래에 백로가 날아든다.
그리고 용천(龍泉)의 하얀 물은 담양읍 쪽에서 구비치며 흘러내리다가 옥천 물과 함께 한 마장 쯤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서석산(무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정자 왼쪽 세 번째 구비의 밖으로부터 비로소 모습을 보이는 데, 아래로 흘러 앞의 두 시냇물과 합류하여 바로 용산(龍山)에 이르러 혈포로 흐른다.
아득한 큰 들은 추월산 아래에서 시작되어서 어등산 밖까지 뻗쳐 있는 데 그 사이에는 도랑과 밭두둑이 널리 널려 있고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농부들은 그 사이에서 봄이 오면 밭갈이 하고 여름이 면 김을 매며, 가을에는 수확하면서 잠시도 쉬는 시간이 없으며, 사계절의 풍경 또한 이처럼 무궁히 펼쳐진다.
한 폭의 천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서 난간위에 기대고 있노라면 높은 산과 먼 시냇물 그리고 떠도는 구름과 노니는 새와 짐승과 물고기 등이 자유롭게 와서 내 흥취를 돋운다.
청려장靑藜杖 지팡이 짚고서 조용히 뜰아래를 거니노라면 푸른 연기는 저절로 멈추어 있고, 맑은 바람은 불어온다. 소나무와 회나무에서는 바람소리 들리고 꽃나무는 향기를 뿜는다. 이렇듯 육신을 잊어버리고 조물주와 즐겁게 놀고 있으니 어찌 아름답다 아니할까.
아 ! 아름답다 이 정자여. 그 안에 있어 보면 빙 둘러 있는 산과 그윽한 경치를 두루 잘 보겠고, 그 밖을 바라보면 아득한 창공은 가히 호탕한 외모를 풍기니, 옛날 유자(柳子: 중국의 문장가 유종원을 말함)의 말대로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일찍이 정자에 올라 공을 면앙정에서 뵈었더니 공은 나에게 말하기를 “이 정자를 짓기 이전에 이곳에서 곽씨(郭氏)라는 분이 살았는데 하루는 곽씨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어대(魚帶)를 띤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있는 꿈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곽씨는 자기 집안이 장차 크게 잘 될 징조라는 생각에서 노승에게 아들 글공부를 부탁하였건만 그 아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가세 역시 곤궁하게 되자 그는 살 곳을 옮겨 갔다. 그리하여 내가 이 터를 취득하게 되었는데 지난 갑신년(1521)에 재산과 돈이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서로 축하한다며 하는 말이 「기특한 이 땅을 공께서 취득하셨으니 이전 날 곽씨의 꿈속에 오늘날의 징조가 있었다.」고 하였다. 나 또한 이곳 산수를 사랑했지만 관직에 있는 몸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고 그 뒤 계사년(1533)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햇볕을 가린 정도의 초정(草亭)을 세워 5년이라는 세월을 즐겁게 놀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게 되자 정자는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초목만 무성해지고 말았다네.
경술년(1550)에 관서(關西) 지방에서 귀양살이 하는 몸이라 온갖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기에 이곳에 정자를 다시 세우지 못한 것이 만년의 한이 되었는데, 다행히 신해년(1551)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 지난날 가졌던 계획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고 싶었지만 재력이 없어 하루하루 생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담양부사 오겸(吳謙)이 찾아와 이곳을 함께 관람하고 나에게 정자를 지으라고 권고하면서 협조하겠다고 하였다네.
그리하여 임자년(1552)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끝내니 정자는 제 모습을 드러내고 좌우의 숲들은 한층 더 싱그럽게만 보였네. 이 정자에서 나의 여생을 보내고 싶은 소원을 이루었으니, 아! 내가 이 땅을 취득한지 이제 30여년이 되었건만 그 사이 인간사의 얻고 잃음은 진실로 말하기 어렵고, 정자가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으니 이 또한 운수가 있다 하겠네. 이 일을 살펴보면 감회가 절로 나니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에게 부탁하니 자네가 나를 위해 면앙정기를 지어 주게나. “
이에 나는 글 솜씨가 부족하므로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공에게 말하였다. “ 저 푸르른 하늘을 누가 우러러보지 않으며, 아득한 이 땅을 누가 고개 숙여 보며 서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러한 줄 알면서도 능히 자신에게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적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공은 이미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정자 이름으로 지었으니 이런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진실로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고 인생이란 끝이 있는 것이니, 끝이 있는 인생으로서 다함이 없는 변화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이에 천지의 영허(靈虛)함과 인물의 영쇄하는 이치를 또한 가히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렇게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요. 어찌 산수의 승경만을 즐거워 할 것인가.
아! 우리 공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 정자 이름처럼 면앙 俛仰이라는 이름을 감당하리오. “
이 얼마나 수려한 문체의 글인가. 문장이 너무 좋고 훌륭하다. 이렇듯 기대승의 문장 솜씨가 탁월하였기에 송순은 성산가단의 기라성 같은 많은 문인들을 놓아두고 약관 32세의 그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 한 것이다.
한편 송순은 면앙정을 칭송하는 면앙정부 俛仰亭賦를 백호 임제에게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백호 임제(1549-1587)하면 개성 기생 황진이 묘에 잔을 붓고 제를 올린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다. 기 記가 이성적이고 지적인 글이라면 부 賦는 감성적이고 미적인 글이다. 그래서 송순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기대승에게는 기를 부탁하고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임제에게는 부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리라. 이 면앙정부에 대하여는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송강 정철을 찾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면앙정에서 5 (0) | 2007.08.19 |
---|---|
면앙정 4 (0) | 2007.08.18 |
면앙정 2 (0) | 2007.07.26 |
담양 면앙정에서 1 (0) | 2007.07.07 |
송강은 지금도 흐르는데 - 송강정 (9) (0) | 2007.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