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에서 (1)
송강정에서 면앙정까지는 차로 얼마 안 걸린다. 유산교를 지나 봉산면 방면으로 가서 봉산파출소를 지난 후에 2분정도를 더 가니 면앙정 입구가 나온다. 차에서 내리니 면앙정이라고 표시된 큰 비가 하나 있다. <도 기념물 6호, 면앙정 1992.10.3>이라고 써진 비이다.
면앙정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잔뜩 우거진 대숲 비탈 사이로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이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너른 평지가 나오고 그 언덕 끝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가 바로 면앙정이다.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봉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제월봉이란 이름은 송나라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평한 <여광풍제월>의 그 제월,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에서 따온 것 같다.
그런데 면앙정은 이 정자의 이름이면서 면앙정을 지은 송순의 호이기도 한데, 여기서 ‘면앙’이란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는 뜻으로, 아무런 사심이나 꾸밈이 없는 넓고 당당한 경지가 담겨져 있다.
정자를 가기에 앞서서 나는 안내판이 있는 곳부터 먼저 간다. 거기에는 <안내판>과 <면앙정가비>와 <면앙정 중수기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맨 먼저 안내판부터 자세히 본다.
면앙정 (俛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이 정자는 면앙 송순 (1493-1582)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것이다.
송순은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이나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등의 후학을 길러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골기와의 팔작지붕이며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기둥이 받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며, 특히 현재의 건물은 1979년 지붕을 올려 오늘에 이른 것이다.
면앙 송순 (1493 성종 24∼1582 선조 15). 그는 국문가사 <면앙정가>를 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면앙정 가단 俛仰亭 歌壇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신평, 자는 수초 또는 성지, 호는 기촌 또는 면앙(면앙정)인 그는 담양군 기곡면(지금의 봉산면) 기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9세때 곡조문 哭鳥文이라는 시를 지어 주위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 신동이었다.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유년기에 그는 숙부 송흠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21세에 진사가 되어서는 당시 담양부사인 눌재 박상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26세 때는 송세림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나이 26세(1519년 10월) 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광조, 김구등은 그를 보고 김일손 이후 이런 뛰어난 문장가는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등 개혁 사림파들은 심정 ․ 남곤등 훈구파들에 의해 화를 입는다. 이에 송순은 크게 낙담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다음 시를 지었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볕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이 시는 사림파의 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생기가 가라앉은 현실을 아파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런데 훈구파들은 이 시에 중상 中傷의 뜻이 있다는 시비를 하여 송순은 자칫하면 화를 당할 뻔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 김안로의 전횡을 간언한 송순은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41세(1533년)에 고향인 담양으로 낙향한다. 그리고 면앙정을 짓고서 시나 읊으면서 자연을 벗 삼아 4년간을 지낸다.
어쩌면 송순은 타고난 벼슬 운이 있었나 보다. 1537년에 김안로가 사사된 후 5일 만에 그는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 집의에 오른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충청도 어사 등을 지냈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한다.
1545년. 명종 원년에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난다. 대윤 윤임 일파는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한다. 이 때 그는 유명한 상춘가 傷春歌를 짓는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오.
이 시는 을사사화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림들을 봄 날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 비유하여 세상을 개탄하는 노래이다. 마치 암울했던 70년대 80년대를 우의하여 사람들에게 불러지다가 금지된 대중가요처럼. 여기에서 꽃은 사화로 희생된 현인 사림들이고, 바람은 간신배들을 말하며, ‘희짓는(심술부리는) 봄’은 어수선한 세태를 말한다.
꽃(현인 사림들)이 진다고(희생당한다고) 하여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간신배들)때문에 낙화하니 꽃의 탓 아니로다.
지나가노라고 심술부리는 봄(시대의 세태)을 시기(탓)하여 무엇 하리.
그런데 이 노래로 인하여 송순은 화를 입을 뻔하였다. 이 노래가 입소문이 나서 어느 기생이 잔치 집에서 불렀다. 이 잔치에는 당시 세도가인 소윤 윤원형 일파의 한 사람인 진복창도 참석하였다. 이 노래를 들은 진복창은 불온 노래라고 말하면서 기생에게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추궁하였다. 다행히도 그 기생이 끝내 묵묵부답하여 송순은 화를 면하였다 한다.
한편 송순은 명종3년(1547년) 그의 나이 55세에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 ‘시를 짓는다.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이 桃李야 꽃인 채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어느 날 하루 명종임금은 궁중에 핀 황국화를 꺽어 옥당관에게 주면서 노래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당의 관리들은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해 하였다. 이 날 숙직인 송순이 이 말을 듣고 시 한 수를 옥당관 에게 지어 올렸다. 명종 임금은 이 시를 보고 감탄하여 누가 지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송순은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 시는 바람과 서리가 섞어 치는 그 시대 상황에서 황국화와 복숭아나 자두 꽃을 은유적으로 대조하면서 풍상에도 늦가을 까지 피는 황국화야 말로 충절과 지조 있는 선비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가 “송강집”에 수록되어 송강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를 풍자한 시를 여러 편 쓴 송순은 1550년에 대사헌·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그해 6월에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 수원 등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1년 반 후에 귀양에서 풀려나 1552년 3월에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건하였다. 이 후 70세에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9년에 한성부판윤과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교우로는 신광한, 성수침, 나세찬, 이황, 박우, 정만종, 송세형, 김윤제, 임억령 등이 있고, 문하인사로는 김인후, 임형수, 노진,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이 있다.
한편 안내판 바로 옆에는 가사문학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면앙정가>의 한 구절을 새긴 비가 서 있다. 이 비는 나중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그 옆의 <면앙정중수기적비>를 본다. 1989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면앙정이 1533년에 세워진 이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이 되었고, 그 후 1654년에 후손들의 힘으로 다시 중건 된 후 오늘에 이르러 퇴락하였는데 1979년과 1989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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