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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면앙정 2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2)

 


  이제 면앙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면앙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방이 있고 사방에 빙 둘러서 마루가 깔려 있다. 이 정자 뒤는 벼랑이고 전망의 중심은 정자 뒤편에 있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깔린 평야, 그 위로 탁 트인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면앙정은 송순이 41세(1533년)때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이다. 그가 면앙정을 지은 것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래 면앙정 터에는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금어(金魚)와 옥대(玉帶)를 두른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오락가락 하는 꿈을 꾼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을 할 것이라 여겨 아들을 공부 시켰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집안마저 가난해졌다. 곽씨는 이곳의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다. 뒷날 이곳이 소위 면앙정 가단을 이루어 당시에 이름난 학자, 가객, 시인들의 창작의 산실 휴식처가 된 것을 보면 곽씨가 해몽을 틀리게 했지만 꿈은 제대로 꾸었던 것 같다.


  송순은 1524년에 곽씨로부터 매입한 이 갈마음수 명당자리에 1533년에 면앙정을 짓는다. 곽씨의 꿈대로 면앙정을 드나드는 출입객들은 호남제일의 가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소세양, 윤두수, 양산보, 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보다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그가 이 초가 한 칸 정자를 지은 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아래 시는 너무나 유명한 자연시이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면앙정자 앞에서 나는 맨 먼저 <면앙정(俛仰亭)> 현판을 보았다.  한문 글씨가 또박또박하게 잘 써져 있다. 이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성수침이 썼다 한다. 청송 성수침(1493-1564)이라면 소쇄옹 양산보가 15세에 조광조 밑에서 수학할 때 같이 공부한 성수침, 성수종 형제가 아닌가. 아우 수종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곧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유학자들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경서를 두루 읽고 태극도(太極圖),〈통서(通書)〉등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송순은 면앙정 현판 글씨를 받기 위하여 성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갔다 한다. 그런데 성수침의 아들이 바로 우계 성혼이다. 나는 면앙정 현판을 쓴 성수침이 송강 정철의 분신과 다름없는 우계 성혼의 아버지라는데 대하여 세상의 인연이 이렇게 기묘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윽고 나는 신발을 벗고 정자 마루로 오른다. <면앙정> 현판이 붙은 왼편 마루 위에는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퇴계 이황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가 함께 적힌 현판, 석천 임억령과 제봉 고경명의 <면앙정 30영시>편액, 그리고 동악 이안눌의 <차벽상운> 현판 등이 붙어 있다.


  먼저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편액부터 본다.  


 俛有地 仰有天

 亭其中 興浩然

 招風月 揖山川 

 扶藜杖 送百年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이 얼마나 담백하면서도 자연과 함께 노는 무위도가인가.     

‘면유지 앙유천이라’.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이 첫 구절에 송순의 마음이,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을 면앙정이라 한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원래 면앙(俛仰)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것(앙불괴어천 仰不怪於天, 부부작어인 俯不作於人)이 큰 즐거움이라고 한 <맹자> 진심장(盡心章)에서 말한  부앙을 조금 바꾼 것이다. 부나 면은 모두 굽어본다는 의미이니 송순이 부를 면으로 바꾼 것 같다.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이 실려 있다.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一樂)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仰不愧於天이며  俯不作於人이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三樂)이다. 면앙은 바로 이락 二樂인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의 의미를 가져다 쓴 것이다.)


  송순이 살았던 당시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로서 지조있는 선비들이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면앙이란 뜻은 송순 자신의 수신(修身)이요 삶의 길이었다. 이런 인생관이 위 시 <면앙정 3언가(俛仰亭三言歌)>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하겠다.


  한편 송순은 1552년, 그의 나이 60세에 당시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축한다. 그리고 스스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는 바가 이제야 이루어 졌다’라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면앙정기(記)>를 백호 임제(1549-1587)에게 <면앙정부(賦)>를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기대승의 면앙정기


  여기에서 먼저 기대승이 쓴 <면앙정기>를 살펴본다. <면앙정기>는 면앙정에 대한 중수내역과 그 배경 등에 관한 산문이다. 이 글은 기대승의 나이 32세인 1558년, 66세의 송순이 완산(지금의 전주)부윤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어졌다.


  고봉 기대승은 당시 유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과 4단 7정론(四端七情論)을 논한 논리와 철학에 뛰어난 사람으로 대사간을 지낸 선비이다. 1527년 광산에서 태어난 그는 1544년 그의 나이 18세 때 광주목사로 있던 51세의 송순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기대승의 집안은 원래  본관이 행주(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서 명문 집안이었는데 그의 삼촌 기준(奇遵)이 조광조와 함께 1519년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화를 입게 되자 전라도 광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호도  옛 본향인 행주의 고봉현을 마음에 잊지 않고 새기는 의미에서 고봉으로 하였다 한다.


  그는 산문 솜씨가 탁월하였다 한다. 이 <면앙정기>도 명문중의 명문장이다. 그러면 송순의 <면앙집> 7권에 있는 <면앙정기>를 감상하여 보자 


면앙정기


  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땅은 한낱 한 덩어리의 흙덩이인데 이것이 깊어져서 강이 되고 우뚝하여져서 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하나의 흙덩이에서 강물이 흐르고 산맥이 뻗어 내렸다.


  인간이란 하늘의 명을 받고 땅의 정기를 받아 산수간(산수간)에 놀고 거처하는 데 눈으로 보면 사랑스러울만하고 귀로 들으면 즐거운 아름다운 경치를  조물주가 인간에게 제공하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람지로서 적당한 곳을 구하여 볼 때 나의 귀와 눈에 싫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반드시 높은 산을 넘고 아득한 곳으로 나간 뒤에야 그 온전한 곳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수백리 넓은 들판에 기이한 산수가 있다면 나는 이 언덕 위에 올라 앉아 노닐며 즐거워하고 싶건만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완산부윤(完山府尹=전주시장)으로 있는 송공(宋公)이 사는 집 뒤 뒤 끊긴 기슭의 벼랑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면앙정(俛仰亭)이라 했으니 앞서 말한 바대로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완전하다는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공의 선조 중에 한 분이 연로하여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기곡리(錡谷里)에서 거주하였기에 자손이 대대로 살았으니 노송당(老松堂)의 옛터가 남아있다. 기곡리에서 북쪽으로 2∼3리도 채 못 되는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산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있으며 토지가 비옥히고 샘물이 좋다. 이 마을 언덕 위에 집이 하나 있으니 공이 지은 것으로 마을 이름은 기촌(企村)이라고 한다. 기촌의 뒷산은 서려있고 울창하며 가장 빼어난 봉우리는 제월봉(霽月峰)이라고 한다. 기촌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제월봉 능선에는 용이 서린 듯하고 거북이가 고개를 쳐드는 것 같이 구불구불하고 높이 솟아 있는 곳이 있으니 이곳에 바로 면앙정이 있다.


  면앙정은 모두 3칸 건물로 긴 상량(上樑)을 얹어서 상량이 도리보다 배나 높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를 보면 단정하고 확 트였으며 판판하고 바르며 그 모서리는 깎아지른 듯 하여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하다. 사면을 비우고 난간을 세웠으며 난간 밖은 지형이 다 약간의 벼랑인데 서북쪽은 특히 절벽이다. 뒤에는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아래에는 삼나무가 무성하다.


  정자 아래에는 암계촌(巖界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에 돌이 많고 깎아지른 듯이 험악하므로 이름을 암계촌(巖界村)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동쪽 뜰 아래에는 약간 아래로 내려간 산세로 인하여 확 터놓고  온실 4칸을 지은 다음 담장을 둘러치고는, 아름다운 화초를 심어놓고 방안에는 서책(書冊)으로 가득 쌓아 놓았다.


  산 능선을 따라 좌우 골짜기에는 소나무와 무성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 정자가 있는 곳은 이미 지형이 높아 한층 더 상쾌하게 보이고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인간세상과 서로 접하지 않으니 아득하여 마치 별천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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