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북한에 대한 퍼주기’에 극력 반대하던 대구의 한 유지가 최근 사업차 중국 단동을 자주 여행하면서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김정일이 수중에 들어가든 군사용으로 전용되든 무조건 쌀을 보내야 한다”고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역설하는 바람에 다들 놀랐다고 한다. 이른바 ‘친북좌파 정권’의 대북정책에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놓던 대표적인 TK 인사인 그가 이처럼 변한 데는 현지에서 북한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이념이나 정권을 떠나 같은 민족으로서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동정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같은 민족으로서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이와는 달리 나는 최근 어느 토론회에서 “통일도 하나의 옵션(선택사항)에 불과하다”는 한 진보적인 학자의 말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고 장준하 선생 같은 순진한 민족주의자가 유신정권의 기만적인 7·4남북공동성명에 속아서 “모든 통일은 다 좋은 것”이라는 식의 통일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졌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통일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도에 불과하므로 실체도 없는 민족을 내세우는 통일의 당위성논리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이 안 돼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발상은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심정적으로는 몹시 거슬렸다.
허기야 ‘민족’은 벗어던져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기고 ‘통일’은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젖혀놓는 것이 요즘 진보 담론의 대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나는 앞서의 대구 시민의 예에서 보듯이 보수와 진보를 떠나 남북한 사람 모두의 심성에는 ‘민족’과 ‘통일’이 일종의 본능처럼 살아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민족을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내세운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등장한 이후에도 민족이라는 본능은 ‘진정한 하부구조’로서 국제주의라는 상부구조에 대해 언제나 승리해왔다는 드브레의 주장도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분단의 특수성이 현실로 존재하는 한 당분간 ‘민족’과 ‘통일’이라는 때묻고 낡은 명제를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민족’과 ‘통일’이라는 명제, 끌어안고 갈 수밖에 곧 남북 철도를 연결하는 시운전을 한다니 대견스럽다. 이와 연계하여 40만 톤의 쌀을 북한에 제공한다는 소식도 반갑다. 어쨌든 굶주린 북한 동포가 조금이라도 허기를 덜 수 있을 테니까. 아울러 전라남도 농민들이 직접 벼농사를 지어 북한에 쌀을 보내기 위한 ‘통일 쌀 한 평 가꾸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소식도 신선하다. 논 한 평에 5천원씩 후원금을 받아 5, 6만 평의 논에 쌀농사를 지어 11월쯤 북한에 보낸다는 계획인데, 가뜩이나 한미 FTA로 위기에 몰린 농민들의 시름도 덜고 통일을 위한 소중한 초석을 놓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라 여겨진다.
인도적 차원에서 농민과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 보수와 진보의 색안경을 들이대거나 앞으로 있을 대선에서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일랑 제발 그만두기를 바란다. 유니세프의 후원금을 낼 때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나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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