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은 지금도 흐르는데 - 송강정에서(1)
이제 소쇄원을 멀리하고 담양 고서면에 있는 송강정(松江亭)으로 향한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만들어진 송강정은 이 곳 지실마을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송강정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로 표시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읍으로 가는 고서면 길로 가니 송강정 표시가 있고 바로 앞에 유산교라는 큰 다리가 나온다. 거기에서 좌회전하여 차를 세우니 도로변에 송강정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도로 안내판이 있는 곳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큰 강이라기보다는 냇가수준이다. 이름하여 죽록천(竹綠川). 죽록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냇가 주변에는 시누대가 심어져 있다. 이 강의 다른 이름은 송강(松江)이다. 정철의 호 송강(松江)도 이 강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1584년 선조17년에 송강 정철은 대사헌이 되고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말을 타고 궁궐을 다니며 총마어사라는 칭호도 받을 정도로 전성기를 이룬다. 그러나 1585년에 들어서서는 상황이 바뀐다. 율곡 이이도 죽고 없는 상황에서 동인의 논박이 거세였기 때문이다. 동인들은 심의겸 등 서인들이 무리지어 다니고 있다고 모질게 공박한다. 그 해 8월에 심의겸은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공박을 견디지 못하여 파직 당하고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우계 성혼, 사암 박순, 윤두수 등 서인들도 모두 물러난다. 송강은 처음에는 부모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고양 신원마을에 머물렀으나, 다시 동인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여 서울에서 천리 떨어진 창평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사건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대 축출로 일컬어진다. 한편 선조의 마음이 서인에게서 떠난 것도 서인이 물러난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송강은 1585년 8월부터 1589년 10월까지 4년간을 창평에서 머무른다. 그의 생에 있어서 이 시기는 정말 힘든 시절이었다. 그토록 총애하던 선조 임금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시련의 시절에 그의 문학은 꽃을 피운다. 이 기간중에 가사문학의 백미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한다. 그가 성공하여 영의정을 여러 번 하였어도 <전후미인곡>이 없었으면 지금 그의 존재를 알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돌계단을 따라서 송강정으로 간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1-2분정도 올라가니 언덕위에 정자가 한 채 있다.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송강정 안내판을 먼저 본다. 안내판은 한글과 영어로 되어 있다.
송강정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274
송강정은 조선 선조 17년(1584)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당시의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후 창평에 내려와 정자를 세운 것이다. 죽록정을 고쳐 지어 송강정이라 일컬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만든 지붕)건물이다. 중재실이 있는 구조이며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송강가사 중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은 산실이 바로 이곳이며, 현재 정자 옆에 1955년에 건립한 사미인곡 시비(詩碑)가 서 있다.
원래 송강정은 선조 때 도문사라는 중이 죽록천 구릉에 조촐한 정자를 지었고 그 이름을 죽록정이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송강이 1585년에 창평으로 내려와 죽록정을 다시 고쳐 지어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송강이 죽은 후에는 폐허가 되었는데 송강의 6대손 죽계공 정재가 1770년에 새로 중건을 하였다.
죽계공 정재는 우계 성혼의 유고에서 이곳에 송강정이 있었음을 발견하고 송강의 시와 우계의 시를 참고하여 송강정을 중건하면서 7언 한시를 지었다.
죽록과 송강은 같은 정자의 이름이다.
송강선생은 훌륭한 벼슬이 끊기어 이곳에서 지냈네.
가련타, 그 옛터 지금은 황폐되었으니
조만간 중수하여 평론함을 들으리라
이런 연유로 1955년에 다시 중수된 송강정은 현판이 두 개이다. 안내판 옆 정자 위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는 현판이 있고, 정자 중앙 정면 위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있다.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이 있고, 한쪽에는 시누대도 심어져 있으며 정자아래에 또 다른 살림집이 있다. 정자 옆 뜰에는 비(碑)도 하나 있다.
먼저 나는 송강정 마루에 오른다. 마루는 방을 가운데 두고 거꾸로 된 디귿자 형으로 되어 있다. 마루위에는 편액이 여러 개 붙여져 있다. 송강정이란 현판이 붙은 중간 바로 위에 ‘숙송강정사 宿松江亭舍 , 망송강 望松江, 증도문사 贈道文師, 차사암운 次思菴韻 ’ 등 시 4수가 차례로 적혀 있는 현판이 하나 걸려 있고, 죽록정 현판 쪽에는 ‘서호병중억율곡’이라 편액과 우계 성혼이 지은 ‘상 송강 안차’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또한 마루 끝에는 ‘신원산방습재’라는 시가 적힌 현판과 송강정 중수기가 걸려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송강의 시 4개가 함께 있는 현판이다. 우선에 <증도문사(贈道文師)> 시부터 감상한다.
도문사에게 지어주다
조그맣게 죽록정 정자를 새로 짓고서
송강이라 맑은 물에 내 갓 끈을 씻는다네.
세간의 거마일랑 모두 물리치고서
강산의 풍월을 그대와 함께 평하리라.
贈道文師
小築新營竹綠亭 松江水潔濯吾纓
世間車馬都揮絶 山月江風與爾評
이 시는 이제 죽록정을 새로 짓고서 속세를 벗어나서 오직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송강 스스로의 다짐이다. 맨날 싸우고 헐뜯고 하는 세상살이는 잠시 잊고서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살아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제2구의 ‘송강의 맑은 물에 내 갓 끈을 씻는다.’는 구절이 많이 본 글귀이다. 생각해 보니, 이 구절은 굴원(屈原)의 ‘어부사’에서 읽었던 구절이다.
일찍이 중국 초나라의 재상 굴원(기원전 339-278)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양자강 지류 멱라강에 돌을 안고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그는 죽기 전에 ‘어부사(漁父辭)’란 비장한 노래를 남긴다. 그는 강가에서 한 어부를 만나 이야기를 한다. 어부가 초췌한 모습의 굴원을 보고 ‘무슨 일인가’하고 묻자 굴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온 세상 모두가 흐려져 있는데/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했으며,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나 혼자만이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어서,
그만 이렇게 추방당한 것이니라.
그리고 굴원이 결연히 죽을 결심을 말하자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돛대를 올리고 사라지면서 이 말을 남긴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어부의 이 말은 세상이 맑을 때에는 갓끈을 씻어 속세에서 벼슬을 할 것이나, 세상이 혼탁할 때는 우선 자신의 발을 씻어 속세를 떠나라는 충고였던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그 속에 빠져 들지 말고 한 걸음 먼발치에서 보라는 말이다.
조정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서 천리 밖 창평까지 온 송강이 다시 입신양명을 꾀하는 ‘갓끈을 씻는다’는 포부를 이 증도문사 시에서 밝힌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러나 이 구절을 역설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보니 이해가 된다. “나는 이 곳 창평에 귀양 아닌 귀양을 왔으나, 나는 곧 갓끈을 씻으리라. 나는 다시 조정에 들어가리라. 번번이 낙향할 때 마다 임금께서는 나를 금방 다시 부르셨다. 잠시 속세를 잊고 자연과 벗하면서 재충전을 하자. 그러면 다시 임금께서 나를 부르실 것이다.” 이런 뜻으로 해석을 하여 보니 이 구절이 이해가 된다.
이윽고 나는 4수의 시(詩) 중에서 맨 첫머리에 있는 ‘숙송강정사(宿松江亭舍)’라는 시를 감상한다.
송강정에서 머물러 자면서
삼십년을 이름만 빌려줬으니
주인도 아니고 손님도 역시 아닐세.
띠 풀을 베어 지붕이나 겨우 덮고는
또 다시 북쪽으로 가는 사람일뿐.
宿松江亭舍
借名三十載 非主亦非賓
茅茨纔盖屋 復作北歸人
삼십년을 이름만 빌려준 사람이니 주인도 아니고 객도 아니다.
죽록정을 다시 고치고 잠깐 있다가 다시 북으로 가는, 다시 말하면 한양으로 가는 사람일 뿐이다. 이 시에서도 송강은 창평에 아예 머물려는 생각이 없음을 은연중에 비추고 있다.
주인과 나그네가 함께 여기 올 적엔
저물녘에 갈매기가 놀래더니만
그 갈매기가 주인 나그네를 보내주자고
도리어 물 가상으로 내려오네.
主人客共到 暮角驚沙鷗
沙鷗送主客 還下水中洲
주인이자 객인 송강이 여기에 올 때는 갈매기가 놀래더니만 이제는 오히려 그 갈매기가 주인 나그네를 보내주자고 물가로 내려온다. 갈매기도 주인 나그네가 너무 오래 머물고 있음이 측은하여서일까. 송강은 괜스레 갈매기를 핑계 삼아 창평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밝은 달은 빈 뜰에 남아 있는데
주인은 어디 곳으로 갔을까.
낙엽은 우수수 사립문을 가리고
바람과 소나무가 밤 깊도록 이야기하네.
明月在空庭 主人何處去
落葉掩柴門 風松夜深語
혼자 있는 자신의 모습. 밝은 달밤에 빈 뜰. 낙엽이 사립문을 가리고. 찾아오는 사람 없으니 사립문에 낙엽만 우수수 쌓여 있다. 바람과 소나무하고만 이야기 하는 송강의 외로운 처지는 정말 처량하다. 명색이 대사헌 벼슬까지 한 몸인데 벼슬에서 물러나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세상인심이란 다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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