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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소쇄원 7 - 송강문학기행

 

 

 

 

   제4장 대숲 바람 부는 소쇄원에서(7)


  지금까지 제월당 마루위에서 소쇄처사 양산보의 장례이야기를 한참 하였나 보다. 이제는 송강 정철과 하서 김인후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본다.

  <국역 송강집>의 송강의 연보에 의하면 송강은 하서 김인후와 고봉기대승에게 공부를 배웠다한다.


이즈음 송강은 스스로 배워야할 필요성을 깨닫고 드디어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청하였고, 그 후 고봉 기대승을 좇아 배웠다.


  또한 김장생의 <송강행록>에도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이 송강의 스승이라고 적혀 있다.


공이 자라면서 기고봉 대승을 좇아 근사록등의 책을 배워서 향방을 알았다. 또 김하서 인후의 문하에 드나들며 항상 그 사람됨을 흠모하고 그 절개를 칭송함으로서 나고 듦의 올바름을 기렸다. 비록 근세의 유현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송강은 하서의 제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떻게 송강이 하서에게 수학을 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다. 나는 아마도 송강의 스승이며 처 외할아버지인 사촌 김윤제가 송강을 하서에게 소개하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소쇄원이었을 것이다. 하서는 소쇄원에 들를 때는 한 달 이상도 머물렀다 하는데 이때 하서는 친구이자 사돈인 소쇄옹 양산보와 소쇄옹의 처남 김윤제와 어울렸다. 때때로 하서는 성산마을에 올 때는 송강의 장인인 유강항을 만나기도 하였다 한다.(유강항은 중종10년(1515년)에 중종의 폐비 신씨를 복위하라는 상소를 올린 무안군수 유옥의 아들이다. 담양군수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군수 유옥은 순창 강천사 계곡에 모여 신비복위소를 올렸다.)


  하서는 송강에게 <대학>과 초나라 재상 굴원(기원전 339-278)의 ‘이소’가 수록된 <초사>를 가르쳤다 한다. 특히 ‘슬픔을 만나다’라는 뜻의 노래인 ‘이소’는 우국지정과 연군지정이 잘 표현된 노래이다. (지금도 순창의 쌍치마을 점암촌에는 하서가 송강에게 대학(大學)을 가르쳤다고 전하는 이른바 ‘대학 바위’가 있다 한다.)


  한편 하서와 송강은 사제 간에 매우 각별하였던 모양이다. 짐작컨대 두 사람 간에는 인종 임금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송강은 큰 누나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이고, 하서는 세자 시절 인종의 선생이었다.


  인종은 세자 시절에 하서와 매우 돈독하였다. 인종은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하서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고, 인종 스스로가 묵죽도를  그려 주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서 김인후는 이 묵죽도에 이렇게 적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이리 정미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정갈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성스런 혼이 조화를 기다리심을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특히 하서는 을사년(1545년) 7월 초하루에 승하한 인종을 못 잊어하는 절의의 신하였으니 송강과 하서의 두 사람 관계는 인종이 맺어준 인연이라 할 것이다. 하서전집에는 <정계함에게 보냄>이란 하서의 시가 있는데 그 시는 이렇다.


철이야 어릴 때도  잘 아는 사이

세상살이 일거리가 많기도 많다.

여러 날 머무르며 취흥 돋우니

병든 몸이 오히려 절뚝거리네.


  아울러 송강은 <하서를 그리며>란 시를 썼는데, 이 시에는 하서가 인종을 못 잊어 하고, 해 마다 인종의 기일에 고향의 난산에 들어가 통곡한 출처가 분명한 사람임이 잘 나타나 있다.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또한 <송강 연보>에 보면 하서는 일찍이 송강을 전송하면서 다음 두 구의 시를 즉흥적으로 지어 불렀다.


엷은 가을 구름 나직히 드리운 저녁

취중에 더 하구나 이별의 아쉬운 정


秋雲低薄幕     別意醉中生


  그러자  송강도 다음 두 구를 지어 즉석에서 화답하였다.


험한  앞길        구불구불 아득도 한데

정말 애달프다     서로 두고 머무는 정


前路崎軀甚        相留多少情


  이 얼마나 사제 간의 정이 흠씬 나는 이별의 시인가. 스승은 제자를 보내니 이별이 아쉽고 제자는 정을 두고 떠나니 더욱 애달프다.


  이렇듯 사제 간의 정이 깊었던 둘 사이에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볼 이별이 온다. 하서가 명종15년(1560년) 정월에 별세한 것이다. 이때가 소쇄옹 양산보가 죽은 지 3년 후이고, 25세의 송강은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창평에 있었다. 


  송강은 스승 하서 김인후에  대한 제문을 이렇게 쓴다.


슬프도다! 선생이시어. 맑은 물에 연꽃 같은 덕의 순결을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다 말하리오만, 나가시면 세상을 상서롭게 하는 기린이시오, 드시면 산을 빛내는 옥이셨도다. 선생님이 출처가 마땅하였다고 이르는 것은 새삼스러울 따름이다. 옛날일이야 잘 알 수 없으나, 이 나라 천년 역사에 오직 우리 선생님 뿐 이시로다.


광풍각에서 


  이제 나는 광풍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제월당에서 문을 통과하여 아래로 내려가서 광풍각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있다. 광풍각 마루에서 폭포가 내려오는 경치를 구경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니 초정 밑에서 흐르는 폭포가 장관이다. 주변의 경관이 정말 좋다. 우측으로는 대숲과 위태로운 다리가 보이고 정면으로는 연못과 애양단의 담과 대봉대,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광풍각은 방문객들에게 방을 내어주는 사랑채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계류 사이의 험준한 공간에 석축을 쌓고 땅을 다져서 만든 이곳은 습한 기운이 감도는 곳인데 건축물은 소쇄원내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있다한다. 소쇄옹은 자연에 묻혀 살았지만 가끔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나 보다. 그런 인사들이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촌 김윤제,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등이었고,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옥봉 백광훈등도 자주 소쇄원을 들렀다 한다.


  나는 광풍각(光風閣) 현판을 본다. 광풍각 이름 또한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 <여광풍제월(如光風霽月)>중에 광풍(맑은 날 불어오는 소슬한 바람)을 따온 것이다. 광풍각 방안에는 <소쇄원도>가 걸려 있고, 마루위에는 <광풍각중수기>, <소쇄원기>현판이 걸려 있다. <소쇄원도>는 1755년에 제작한 소쇄원 목판 탁본 그림이다. 여기에는 맨 위에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시 제목이 적혀져 있고 소쇄원 조영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마치 건축도면을 보는 것 같다. (한편 소쇄원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거의 불타고 나서 1614년에 소쇄옹의 손자 양천운(양자징의 셋째 아들)이 다시 소쇄원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제 위태로운 다리(위교)를 지나 다시 소쇄원 입구로 나온다. 위교 옆에는 빽빽한 대나무 숲이다. 나는 양산보의 후손이 사는 집에서 <소쇄원도> 복사본 한 장을 1천원 주고 샀다. 이윽고 소쇄원 입구에서 아내와 군대에서 휴가 온 두 아들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대나무 길을 걸어 나온다. 그러면서 소쇄원 주인이 후손에게 남긴 유훈을 새겨본다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가운데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이런 유훈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런 원림을 보면서 은일자의 삶을 조선 선비의 삶과 풍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이제 발길을 담양 고서면에 있는 송강정으로 옮긴다. ‘동방의 이소’라고 일컬어지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만들어진 정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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