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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칼럼 모음

쉽게 쓰기

 

 

  태평로] 쉽게 쓰기의 어려움

  • 김광일 문화부장
    • 아침에 문 앞에서 신문을 집어 들면 광고 전단지가 수십 장씩 들어 있다. 요즘은 그 중 절반 이상이 논술학원 광고다. 백화점의 겨울철 세일용 광고 전단지들을 앞지른 지 오래됐다. 논술학원들은 대입 논술고사가 치러지는 겨울방학 때 벌어서 1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12월과 1~2월에 성시를 이루고 있다.

      매일 글을 써야 하는 직업인인 이유도 있고, 또 고3 수험생의 부모 때문이기도 해서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의 교수들과 이런저런 자리를 함께할 때마다 묻게 된다. “논술 채점할 때 어떻게 쓴 글에 점수를 많이 줍니까?” 교수들마다 약간의 의견 차이는 있지만 답변을 정리하면 좋은 논술의 특징은 이렇게 요약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스스로를 알고 쉽게 쓴 글입니다. 무조건 남보다 튀려는 글, 영글지 않은 생각으로 독창성을 과장하려는 글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제시문을 정확히 이해한 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알기 쉽도록 쓴 글이 좋습니다.”

      ‘쉽게 쓰자’는 운동이 전개된다면 그 전도사로 기억할 만한 문인 중에 시인 이형기 선생이 있다. 언론인이자 칼럼니스트로서 필명을 날리기도 했던 그는 늘 “쉽게 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관련 글들도 많이 남겼다. 그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시로 유명하다. 시 제목은 ‘낙화(落花)’다.

      그는 서머싯 몸의 명작 ‘서밍 업’이 자신에게 그런 태도를 가르쳐 준 책이라고 말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했다. ‘나는 독자에게, 자기가 쓴 글의 뜻을 이해하도록 노력해달라고 요구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형기 선생은 몸이 쉽게 쓰는 좋은 문장가의 표본으로서 여류 작가 가브리엘 콜레트를 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콜레트는 몸에게 이렇게 한탄했다는 것이다.

      “내가 문장을 쉽게 쓴다고 하지만, 나 자신은 하루 종일 걸려 반 페이지도 못 쓰는 날이 너무나 많다.”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이 남들은 모르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알려주는 예화(例話)다.

      쉬운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고 난해한 것들을 두루 섭렵해 자기 것으로 만든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재들이 모인다는 해외의 유명 대학에서 우등생들만 따로 여론 조사를 해보면 그들의 가장 절실한 소망이 ‘쉬운 글을 잘 쓰는 것’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법과나 문과를 지망하는 학생뿐 아니라 자연과학도에게 그런 고민은 더 크다.

      신문에서도 기자들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또는 외부 필자에게 좋은 글을 청탁하고 받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이메일시대, 휴대폰 문자시대의 절정기를 통과하면서 바야흐로 활자문화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기 때문에 쉽고 좋은 글에 대한 독자들의 요구가 무한대로 늘어나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혼자만 알아 먹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 다른 사람이 이해하려면 두세 번씩 정색을 하고 읽어야만 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각 직장이나 활동 영역에서 퇴출 대상 1순위가 될지도 모른다. 언론인이 쓰는 기사나 칼럼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리포트, 교수들의 논문, 직장인의 기안서류, 문인들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올 한 해 좋은 대통령을 고르기 위한 기준 가운데 하나로 각 후보가 얼마나 쉽고 명징한 말과 글을 사용하는지도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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