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던 날
떠러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는 남달리 좋아 했던 모란을 소재로 하여 이 지상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의 짧음과 그로 인한 비애를 다루고 있다. 이 시에서 모란은 여러 가지 꽃 중의 하나이면서 지상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일 게다. 이 시에는 비록 그것이 나에게 슬픔을 줄망정 그 꿈을 버리지 않겠다는 집념과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피어날 모란의 아름다움에의 (찬란한) 환희, 그리고 곧 소멸하게 될 꽃으로 인한 슬픔이 한 데 섞인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시적 자아는 이 땅위의 세계에서 순간적인 아름다움이 슬프지만 사랑하고 있다.
정성들여 가꾼 모란, 그것들이 피기를 기다리는 '오월', 화자가 기다리고 또 보내기를 꺼려하는 '봄'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월'이 가면 또다시 그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봄'은 시인이 시대 배경을 염두에 두고 노래 부른 것인가?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실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보람과 이상이 꽃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화자가 기다리는 '봄'의 의미를 앞에서 말한 것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면 그럼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가? 자아에서 큰 이상과 가치의 세계로까지 확대되는 보람과 최고 목적이 '봄'에 포용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며 음미해 보자.
1930년대 시문학파(순수시파)의 대표적 시인인 영랑은 경향파의 목적시를 거부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였다. 아름다운 시어, 감미로운 서정,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