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주의적 상징주의 화가
(1946년 3월30일 조형예술 1호/7~8p) 출생년도 : 1924 출생지 : 전남고흥
흔히 원로화가 천경자는 신들린 듯 화려한 색채와 사실주의 형식으로 요약되는 채색화풍의 동양화가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매력과 독창성은 무엇보다도 대담한 장식성과 주제의 서정적인 함축성과 상징주의, 전통적인 동양화의 패러다임으로부터의 과감한 탈피에 있다.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 여인, 꽃, 동물과 같은 소재들, 이들 소재의 원근법을 무시한 종합주의적인 배열과 전면적인 화면구성과 더불어 특징적인 현란한 색채와패턴과 같은 형태 모두가 의례적인 전통화법을 무시한 작가의 탁월한 장식적 직관과 환상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의 화폭들은 즉각적으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끌어당긴다. 자전적 요소를 내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학적 상징성이 함축되어 있는 그의 형상들과 모티브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도식화되어 있어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의 그림들은 평이하게 전달되며 여기에 그의 지속적인 저술활동은 그의 작품과 명성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때문에 그는 지나치게 대중의 우상으로서의 나르시시즘 적인 환상에 빠져 있지 않나 하는 비판도 야기시켜 왔다. 이러한 비판의 근거로는 그의 자전적 작품에 빈번히 나타나는 헐리웃의 우상들-그레타 가르보, 마릴린 몬로, 마돈나, 어릴 때의 우상인 길례언니, 보티첼리의 대표작인 <프리마베라>(그림9)의 꽃의 신인 플로라 등을 들 수 있다.
여하간 그의 지금까지의 화력을 통틀어 볼 때 작가자신을 연상시키는 이목구비가 강하게 윤곽 지어진 짙은 화장의 기괴한 요기가 도는 여인이 자주 화폭에 등장하며 갖가지 꽃, 동물 흑은 카드, 그리고 신비스런 향내를 풍기는 환상적인 색채들은 바깥 활동보다는 실내와 내면 생활, 특히 꿈과 환상을 즐기는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유아적인 그의 감성을 드러내 준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재료학적 측면을 제외하고는 이른바 전통적인 동양화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을 극히 드물며 그가 창안해낸 꽃으로 장식한 화사한 여인의 환각적인 이미지는 그와 동시대 작가들이 그렸던 50년대의 전형적인 한국여인의 각고와 인내의 상 - 가령 박수근의 아이를 업고 물동이를 이고, 혹은 빨래터에서나 부엌에서 일을 하거나 또는 남편 뒤에서 묵묵히 보따리를 이고 가는 여인네들 - 이나 혹은 장우성, 장운상의 미인도들에서 볼 수 있는 요조숙녀 타입의 이상적인 미인들과는 계급적 유형에 있어서나 도상에 있어서나 대조를 이루며, 이는 통상적인 삶의 방식과 윤리관, 도덕적 관행을 수용하지 않고 낭만주의적 感傷과 왜곡된 자유주의에 편승한 삶의 질곡과 체험을 기초로 한 자신의 자아도취적 인생관 내지는 심미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는 간혹 나혜석과 비교되나 물론 그의 특이한 "팜므 파탈(Femme Fatale)"적인 여인상은 자신의 독창적인 창조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작품에서는 두드러진 변화가 감지되지 않으며 주제나 양식 면에서 전통화적인 계통보다는 서양미술사에서, 특히 19세기 상징주의나 20세기의 초현실주의에서 그 문맥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자주 그리고 있는 꽃과 여인의 모티브는 타히티의 고갱과 그의 양식을 기초로 한 나비파, 혹은 채색시기의 르동의 작품들에서 출처를 찾을 수 있으며, 개개의 단위를 강조하면서도 같은 요소를 반복, 병치하고 있는 수법이라든지 정글 속의 누드의 모티브는 고갱의 상징주의를 환상적 원시주의와 결합, 후에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주는 앙리 루소를 번안한 것으로 보인다. [<초원>(도판34), <아리만다의 그늘> (도판 44), 비교자료: 고갱 <처녀성의 상실>(그림 10), 루소 <꿈>(그림 11)] 50년대 말경부터 60년대 후반에 이르는 비교적 초기 작업들의 색채와 필법, 스케일의 전도와 같은 구성은 샤갈을 연상케 하며 샤갈의 영향은 꽃과 여인의 모티브에서도 나타난다(그림 12). 형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시기, 특히 60년대의 작업에서는 당시 한국화단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듯 추상화된 형태와 색채가 화면을 지배하나 형상과 네러티브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있어 이 상반되는 관심을 작가는 역동적인 구성과 필법으로 융화시키고 있다. 70년대 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르네상스 작가들의 작품의 사실주의와 윤곽선의 중요성을 재삼 확인한 듯, 필법은 이전보다 훨씬 통제되며 엄격해진다. 70년대 말, 8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 그의 데생은 더욱 정교하고 세밀해져 형태들은 분명한 윤곽선으로 정의된다.
천경자의 화가로서의 데뷰는 그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시절, 1942년과 43년 연이어 선전에 입선하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작품인 (老婦)(도판 1)는 동경여전 졸업전 작품으로 깔끔한 세밀화풍의 채색화이며, 그의 탁월한 묘사력과 견고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그가 화단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 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작품은 원형을 이루며 서로 엉키고 꼬고 있는 35마리의 뱀을 묘사한 <생태>(도판 2)라는 별로 규모가 크지 않은 그림이다. 이 그림 이후 그의 작품에는 자주 뱀이 등장한다. <생태>에 대한 영감의 효시는, 작가에 의하면,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3등 열차칸 에서 환상으로 본 "찔레꽃 사이로 사라지는 실배암 두 마리"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고 한다. 뱀에 대한 그의 유다른 환상은 어릴 때의 친구의 죽음, 그의 집에 빈번히 나타나 놀라고 무서웠던 기억, 고통만 남기고 떠난 뱀띠 애인에 대한 적개심과 어우러져 그를 집요하게 사로잡았고, 광주 역전의 배암집에 열심히 드나들며 이 동물을 스케치하고 생태학을 연구하면서 그의 뱀에 대한 기억과 환상은 하나의 예술로 구현된다. 뱀의 상징성은 동서양의 구분 없이 이 치사적인 동물의 생태학과 연관된다. 첫째, 뱀은 순수하고 원시적인 힘과 氣, 나아가 그 힘의 양극성과 다원성의 상징이다. 뱀의 상징적 의미의 다양성은 하나의 총체로서의 동물이나 아니면 그의 주요 특징들 중의 어떤 것 - 가령 뱀의 蛇선의 움직임, 탈피방법, 위협적인 혀, 몸 동작의 구불거리는 패턴, 그의 소리, 연줄, 제물 주위를 꼬며 공격하는 방법 등 - 과 연관될 수 있다. 인도에서의 뱀儀式 흑은 뱀의 정령에 대한 의식은 바닷물과 관계되어 생명의 원천과 불멸성의 상징이며 서양의 어떤 곳에서는 파도와 같이 뱀의 꿈틀거리는 형태는 깊은 심연과 위대한 신비의 지혜의 상징도 된다. 그런가 하면 신지학자 블라바츠키(Blavatsky)는 생태학적인 면에서 뱀은 물질의 힘의 유혹의 상징, 따라서 回旋과정의 작용들, 가령 어떻게 상위의 것 안에 하위의 것이, 또는 이후의 것 속에 이전의 것이 잠재하는가에 대한 회선의 분명한 해제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가스통 딜(Diehl)에게 뱀은 한 개인의 죄의 상징이 아니라 모든 세속적인 물질 속에 내재해 있는 악의 원리의 상징이다. 뱀과 여성적 원리간의 명백한 연관은 많은 신화학자, 종교학자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엘리아데(Eliade)는 이브가 뱀으로 의인화된 고대 푀니시아의 지하의 여신 - 이브의 적이며 유혹자인 리리스(Lilith)의 우의적 상징에 다름 아닌 - 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이와 유사한 상당수의 지중해 여신들-이들은 뱀을 한 손에 혹은 양손에 쥔 모습으로 나타난다-의 경우를 예증으로 들고 있다. 중앙유럽에서는 여성에게서 뽑힌 머리가 달의 영향하에 뱀으로 변한다는 신앙이 있다고 엘리아데는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신들의 이름은 뱀을 재현하는 일련의 기호들로 결정되며 이것은 여성 때문에 정령이 물질과 사악함으로 타락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뱀은 다른 파충류와 마찬가지로 생의 가장 원시적이고 태고적인 단계와 관련되며 동시에 지고의 영혼의 목적과 인유의 발전을 위해 훈련되고 통제되며 승화되어야 할 원시적인 힘과 氣를 의미한다.
신화학자이며 상징학자인 테이야르(Teillard)의 정의를 따르면 뱀은 무엇보다 끌어당기는 힘의 상징이자 자신의 가죽을 벗는 이유로 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뱀이 원을 그리며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도해는 영혼의 영원성과 불멸의 상징이다. 반면, 치사성과 사악함 때문에 뱀은 자연의 악한 면을 상징한다. 정신철학자인 융(Jung)은 뱀이 가장 정신적인 동물이며 심리학적으로 무의식의 비정상적인 활동의 표현인 불안의 징후를 상징한다고 한다. 힌두학자인 짐머 (Zimmer)에게 뱀은 창조와 재생을 결정하는 생명의 힘과 기운이며 따라서 생명의 바퀴와 연관된다. 요약해, 뱀은 고대부터 순환의 양면적 요소에 속한 양극성과 관련되며 물질과 에너지를 제공하며 이성과 상상력, 어둠의 힘으로서 전개되는 우주의 소도구라 할 수 있다. 뱀의 상승하는 蛇선의 움직임은 하위의 힘과 상위의 사고를 연결하는 기능을 상징한다. 18세기의 영국화가이며 미술이론가였던 월리암 호가스(Hogarth)는 그의 영향력 있는 이론서 [미의 분석(Analysis of Beauty)] 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으로 蛇선을 꼽고 있다. 천경자가 뱀의 이러한 다양한 상징성에 대한 연구를 그의 그림과 연관해 수행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나, 이 끔찍한 동물에 대한 그의 남다른 체험과 시각은 위의 학자들의 도해와 위배되지 않는 해석을 직관적으로 도출해 냈을 것이다. 특히 <생태> 이후에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여성과 뱀의 이미지의 결합은 그가 동물에 대한 다분히 가부장적인 신화와 "신앙, 전설의 여성=유혹적인 힘=악의 원리"의 도식화된 상징체계를 직관적으로 수용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19세기말 상징주의에서 빈번한 주제였던 Femme Fatale, 즉, 치사적인 마력을 지닌 요녀, 마녀의 상들은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간주된다. 상징주의에서 이브는 그의 적이며 유혹체인 리리스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비교자료: 고갱 <이국적인 이브>(그림 13), 루소 <뱀의 마술사>(그림 14)] 초기의 예로 1955년 대한 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정>(그림 3)의 중심인물인 검은머리의 삐죽한 입과 눈의 소녀는 어린 마녀의 형상으로 보인다. 안고 있는 검은 고양이가 이러한 도해의 단서다. 이 그림은 대형작품으로 천경자가 홍대 교수로 재직한 이듬해에 사실화법으로 제작, 비교적 전통적인 동양화풍으로 그린 것이다. 대통령상의 수상은 그에게 자유를 준 듯, 이후부터 그는 세밀화풍의 사실주의를 벗어나 환상적인 색채와 몽롱하고 소프트한 필법으로 정의된 꽃구름, 꽃너울로 둘러싸인 다소 몽환적인 형상들로 구성된 특징적인 천경자 화법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정>(그림 3), <전설>(도판 4), <환>(도판 5), <숙>(그림 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변화는 아마도 그가 영감의 출처를 전통화에서 서양미술사로 전환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샤갈 풍의 적색, 주황색, 청색, 거기에 백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여기에 마네킹과 같이 가느다랗고 긴 사지, 가면과 같이 과장된 이목구비의 인물들은 몽환적인 무드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형태들의 배치는 정면성과 수직원근법을 적용 비교적 단순 평이하게 전개해 화면의 표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간배열은 그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 - 김환기, 박수근 - 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 구도법은 주제인 뱀이 또아리를 틀며 상승하는 사선운동을 묘사, 역동적인 리듬을 화면에 연출하고 있는 <사군도>(도판 14), 1969년작이나 소품들을 제외한 작품들 전부에 적용되고 있다.
1970년 천경자는 6개월간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그 간의 여행에서 얻은 감흥을 작품에 옮긴다. 1973년의 <이탈리아 기행>(도판 32)은 그가 얼마나 이탈리아의 미술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는가를 입증해준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그림 9)에 나오는 꽃의 여신 플로라는 특히 꽃과 여인 모티브에 관심을 가져왔던 그에게 유별난 감흥을 불러 일으켰던 듯, 화면 중앙에 거의 변형 없이 묘사되어 있고, 상단 오른쪽에는 초기 르네상스 작가의 <성가족의 이집트로의 피신>이 재현되어 있다. <프리마베라>책자 밑에 베니스의 산 마르코사원의 파사드가 스케치된 스케치북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고 이 책들은 그가 여행 때 소지했던 용품들, 장갑, 술병, 트럼프, 목걸이, 머플러와 함에 꽃다발들과 겹쳐져 놓여 있고 하단 오른쪽에는 작가의 손으로 여겨지는 매니큐어를 바른 손이 손짓하고 있다. 미묘한 변조를 주어 깊이감을 산출해내고 있는 밤색 톤의 배경은 그 위에 놓인 상호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일하면서 긴장된 조화를 일구어 내 이전의 작품들에서 일찍이 보지 못하던 구성의 견고함 과 사고의 무게를 화면에 부여하고 있다. 이 작품에 비하면 같은 해에 그린 <꽃과 나비>(도판 17)는 부서져버릴 듯 연약하고 처량해 보인다.
천경자의 화폭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꽃의 상징주의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기본적으로 다른 고찰 - 하나는 꽃의 본질, 다른 하나는 꽃의 형태 - 로 특징 지워진다. 꽃의 성질로 인해 그것은 일시성, 봄 그리고 미의 상징이다. 중국신화에 의하면 꽃은 생명의 짧음과 쾌락의 덧없음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그들의 축연에 언제나 화관을 둘렀으며 시신에 일종의 제물로 꽃을 뿌렸다고 한다. 다시 말해 꽃은 죽음의 실재를 연상시키며 동시에 생의 기쁨을 향한 흥분제이기도 하다. 한편, 꽃은 형태 때문에 중심의 형상이며 따라서 영혼의 원형적 이미지다. 아울러 연금술사들에게 꽃은 태양의 상징이다. 상징의 의미는 꽃 색깔에도 적용된다. 가령 주황 혹은 노란색 꽃은 태양 상징주의의 강화를 나타내며 적색 꽃은 동물의 生, 피와 열정과 관련된다. 청색 꽃은 불가능의 전설적인 상징이며 "신비의 중심"을 시사한다. 꽃의 양면성의 속성은 작가의 1977년작 <아열대>에서 잘 드러나 있는데, 이 작품에서 헐리웃의 우상이었던 마릴린 몬로는 꽃으로 변해 그의 아름다움과 함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꽃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그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나비, 새들도 영 혼과 관련된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천경자의 작업은 대상들을 화면 더 가까이 클로즈업 시켜 분명한 윤곽선으로 정의하여 결합이나 융화보다는 각 요소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고독의 화신인 양 <길례언니>(도판 19)의 비잔틴 예수같이 정면을 향해 부릅뜬 커다란 두 눈에는 우수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자신이 어릴 때의 우상이었던 예쁜 길례언니는 이제 다가갈 수 없는 부동의 자세로 허공을 응시, 주위와 마찬가지로 경직된 필법과 구성으로 기호화된 꽃, 나비와 어우러져 있다. 관통할 수 없는 엄숙함, 화석과 같이 경직된 표정과 자세는 이듬해에 그려진 <노오란 산책길>(도판 27)에서도 여전하다. 늘어진 수양버들잎들로 자신이 안고 있는 꽃다발과 함께 화사함을 드러내려 하고 있으나 <길례언니>(도판 19)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도식화된 기호들로 취급하여 화면의 경직성을 증강시키고 있다. 비록 위를 쳐다보며 앉아 있거나 누워 있어도 시간이 정지된 듯한 경직성은 <카이로 테베기행>(도판 43)과 <아리만다의 그늘>(도판 44)에서도 감지된다. 마치 단어만 나열하듯 같은 공간에 존재하나 서로 연결되지 않는 동물, 새, 꽃, 여인의 형상들은 그들이 지니는 상징성과 수수께끼 같은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초현실주의적인 마술과 환상의 아우라를 작품에 부여하며 이 후기작들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는 이국적인 동물들, 요소들의 나열적인 반복, 병치의 형식은 앙리 루소의 정글 그림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은 고갱의 영향을 받았으나 꿈과 마술적인 환상세계를 더 잘 이해했고 표현했다던 루소가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인체의 대담한 스케일과 장중함은 천경자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재고를 드러내고 있으며, 노년의 고독은 그에게 새삼 자아의 인식을 환기케 한 것 같다.
1990년대로 오면 그의 생활이 아파트의 폐쇄적인 실내공간에 한정되고 있는 탓인지 풍경적 요소보다는 카드, 애완용 개, 고양이들이 자주 등장하나 양식에는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요약해, 천경자의 40여년에 걸친 작업의 특징은 동양화가 혹은 한국화가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거의 의도적으로 장르의 구분을 수용하지 않고 샤갈, 로랑생과 같은 미술사의 주요 경향권 외에 있었던 서양의 현대미술가들에 차용해 구축한 자신의 독자적 양식을 고집해 왔다는 것을 우선 들 수 있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초기의 채색동양화가의 길을 걷다가 당시 한국 화단을 풍미했던 큐비즘과 구성주의를 수용,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던 박래현과 좋은 대조가 된다. 아울러 그의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이 풍부해 주제의 함축성 있으면서도 효율적인 시각적 도상을 계발, 대중에게 친숙한 상징언어를 전달해 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가 대중에게 쉬이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자전적인 얘기를 대담하고 솔직한 방법으로 구사,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의 이미지를 뚜렷이 인식토록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이며, 그의 삶과 예술이 그 증거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