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poet 한 편

한하운 - 전라도길 , 보리피리

 

 

 

 

[한하운 편]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신천지}, 1949.4)
 

<핵심 정리>
6.25 동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발표된 12편의 작품 중 하나로서 이 시의 부제(副題)는 '소록도로 가는 길'이다. 전라남도 고흥군에 속해 있는 나병 환자들의 요양원이 있는 성한 사람들로부터 유리된 하나의 유형지였다. 1949년 5월에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정음사에서 발간되었는데, 그가 나병 환자라는 사실 때문이에 충격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성격 : 애상적
▷특징 : 끝없는 천형의 길을 걸으며 애수와 절망의 극한을 사실적으로 그림
▷제재 : 소록도 가는 길
▷주제 : 나병 환자들의 유랑과 고독

한하운은 나병의 병고(病苦)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悲痛)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다간 천형(天
刑)의 시인이다. 부제 <소록도로 가는 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의 수용소를 찾아가는 나병 환자인 화자의 고달픈 삶을 잘 나타내고 있다. 천형이라
는 운명적 삶을 살아가는 그의 무거운 발걸음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뿐'
이라는 첫 구절과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이라는 마지막 구절에 제시되어 있다. 따라
서 '천리'는 고향 함경남도 함주에서 전라도 소록도까지의 공간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화자의 절망적 삶의 모습이자, 평상인들과 결코 동
화할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거리감 즉, 삶의 거리감을 뜻하기도 한다.
그 아득하고 막막한 여행 길에서 어쩌다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가운' 화
자는 그들에게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깊은 동류애(同類愛)를 느낀다. 버림받은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의 설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이 미덕 뒤에는 '절름거리며 / 가는'
고통이 있으며,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 슬픔이 자리한다.
그러므로 간신히 천안에 당도해도 여름해는 여전히 거친 수세미 같은 무더위를 내뿜고 있을
뿐이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느 버드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신을 벗으면 /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진 사실을 발견해도 화자는 놀라거나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앞
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계속 갈 수밖에 없다고 담담하게 말함으로써 화
자가 지닌 냉엄한 현실 인식과 '소록도'로 표상된 안식처를 간구하는 화자의 비극적 모습이
잘 투영되어 있다.
 
 

 보리 피리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시집 {보리피리}, 1955)
 

이 시는 '보리 피리'에서 환기되는 소박한 낭만적 정서가 아닌, 나병이라는 육체적 고통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극복한 명작이다. 일반인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고통 속에서 보리 피리를
불며 어린 시절 꽃 청산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은 '인환의 거리(인간들이 많이 모여 사
는 곳)'와 '인간사'를 꿈꾸며 절망하지만, 마침내 방랑의 숱한 산하와 눈물의 높은 언덕을 건
너는 더 큰 아픔을 통해 자신의 절망을 내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정형률을 살린 민요체의 정감 어린 가락으로 비유나 상징이 없는 간결하고 평이한 시어로
구송(口誦)하듯 노래하여 진정 아름다운 시로 격상시킨 이 작품은 자신의 한맺힌 삶을 '피
- ㄹ 닐니리'라는 애절한 피리 소리에 담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피
리를 부는 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행위이자, 자신을 학대하는 인간
세상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실어 보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시 poet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조 - 사랑의 시인  (0) 2006.12.25
김영랑 -춘향  (0) 2006.12.24
시화전  (0) 2006.12.21
서정주의 시 . 시.  (0) 2006.12.16
시집 만들기 _꽃, 그리움  (0) 2006.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