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편]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12)
이 시는 첫 시집 {화사집}의 표제시로서 미당의 초기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초 기시는 자연보다는 인간을, 그 속에서도 선보다는 악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선택함으로써 자 연과 선의 세계를 주된 주제와 소재로 다루었던 우리의 전통 시가에 대해 반기를 들게 되었 다. 이 시는 원초적 생명력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배암'을 통해 소위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초기시 세계의 문을 연 작품이며, {화사집}은, '보들레르'의 퇴폐적 관능미와 저항 정신이 미 당의 토속적 원생주의(原生主義)와 결합됨으로써 탄생한, 한국시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 었던 미적(美的) 세계의 확대와 구축이었다. 먼저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가 되는 '화사'는 꽃뱀을 뜻한다. 흔히 뱀은 그 징그럽고 꿈틀거 리는 생김새로 인해 '악(惡)'을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는 여기 에 '꽃'이 결합된 꽃뱀이므로 뱀의 일반적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화사'는 표면적으로는 꽃처럼 아름다운 빛깔과 무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징그럽고 꿈 틀거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양면성의 존재, 모순의 존재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얼핏 보아서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혹의 뱀'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여기서는 뱀을 원시적 생명의 대상 소재로 하여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원초적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추구하고 있으며, 때묻지 않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 고 있다. 1연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배암'은 인간의 증오의 대상으로 태어난 슬픔 때문 에 징그러운 몸뚱아리를 갖고 있다는 뱀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사향 냄새가 나는 향기로운 풀섶길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배암'을 '징그러운 몸뚱아리'로 인식하는 데서 '화사'의 이중성 이 나타난다. 2연은 징그러우면서도 매혹적인 이율배반의 '배암'의 모습을 '꽃대님'으로 제시 하고 있다. '대님'은 한복 바지를 입은 뒤, 바짓가랑이 끝을 접어서 졸라매는 끈을 뜻한다. 뱀의 길이와 비슷할 뿐 아니라, 우리와 친숙한 소재이므로 화사를 '꽃대님 같다'로 표현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3연에서 '달변의 혓바닥이 / 소리 잃은 채 날름 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변화한다.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은 소리를 잃어버리고, 남은 것은 다만 '날름거리는 아가리'뿐이다. 옛날의 달변과 지금의 실어(失語)로 대비되는 '배암'의 슬픈 운명을 보며 화자는 '푸른 하늘이다 ……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라며 뱀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는 존재의 원죄적 모순성에 대한 화자의 강한 저주와 증 오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4연은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라는 하나의 시행으로, '물어뜯어'라며 부추기던 시행과 관련되어 더욱 심한 저주와 증오를 드러내고 있다. 5연은 원죄적 숙명을 극복하려는 운명과 의 대결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라는 표현은 화자의 공격적 행위 를 의미하지만, 화자는 곧바로 뱀과의 대립에서 오는 긴장을 풀며, 뱀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옮기는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돌을 던지며 뱀을 뒤쫓는 화자 의 행위는 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를 얻게 된 데 대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석유 먹은 듯' 불타는 '가쁜 숨결'로 인한 것임을 밝히며 그간의 저주와 증오를 완화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가쁜 숨결'이란 뱀을 뒤쫓는 데서 오는 숨가쁨이 아니라, 관능적인 숨가쁨이다. 그러 므로 이러한 화자에게서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의식을 부정하면서 인간의 원초적 인 관능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석유 먹은 듯'의 반복과 생 략 부호의 반복은 바로 '가쁜 숨결'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표현이다. 4연의 '대가리'는 남성 의 성기를 충동적으로 느낀 뱀의 원형적 심상으로, 5연의 '석유 - 가쁜 숨결'로 이어져 8연 의 '순네'와 연결되고 '스물 난 색시'의 관능으로 확대된다. 6연은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난 뱀을 몸에 두르고 싶다는 소유욕을 말하고 있 으며, 7연에서는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클레오파트라의 고운 입술로 나타난 뱀의 입술 이 화자에게 스며들기를 바라는 관능적 욕망을 보여 주고 있다. 8연은 관능과 생명력이 고 조된 연으로 스무 살 '순네'의 고운 입술을 뱀의 입술로 인식하는 화자는 마침내 '순네'가 뱀 이 되어 자신의 몸 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라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의 원시적 생명력과 욕망에서 오는 악마적 전율과 예찬을 통해 서구적 발 상과 토속적 사고의 융합을 교묘하게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귀촉도(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銀河)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춘추} 32호, 1943.10)
제1시집 {화사집(花蛇集)}에서 보여 주었던 '보들레르'의 악마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 적 사상에로 접근, 영겁(永劫)의 생명을 추구하는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한 제2시 집 {귀촉도}의 표제시가 된 이 시는 사별한 임을 향한 애끓는 정한과 슬픔을 처절하게 그리 고 있는 작품이다. '귀촉도'란 흔히 소쩍새 또는 접동새라고 불리는 새로, 이 작품에서는 촉제(蜀帝) 두우(杜宇) 가 죽어 그 혼이 화하여 되었다는 (杜宇死 其魂化爲鳥 名曰 杜鵑 亦曰子規 ; 成都記) 전설 을 소재로 하여 죽은 임을 그리워하는 비통함을 표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귀촉도'는 말 그 대로 '촉으로 돌아가는 길'을 뜻하여, 멀고 험난한 길[촉도지난(蜀道之難)]의 의미로도 사용 되는 중의적인 어법이다. 1연에서는 '임'이 가시던 모습과 그 가신 길이 너무 멀기에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음을 '삼만 리'라는 거리감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삼만 리'가 상징하듯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난 임을 그리 워하는 화자인 여인은 억누를 수 없는 슬픔 때문에 눈물이 '아롱아롱' 맺힌다. 두견화인 '진 달래꽃'은 새의 전설과 관련된 시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에서 도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백의 민족(白衣民族)이 갖는 근원적인 한(恨)을 느낄 수 있다. 2연 은 돌아오지 못하는 임에 대해 '신이나 삼아 줄 걸',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하면서 생전 에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를 나타내는 한편, 임이 다시 살아 돌 아오기만 한다면, 지극한 정성을 다할 것이라는 비원(悲願)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3연에서 는 화자의 감정 이입인 '귀촉도'의 울음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 새는 그리움·서러움·후 회스러움 등의 감정이 사무치고 북받쳐서 '목이 젖은 새'이며 '제 피에 취한 새'이다. 그러므 로 새의 울음은 겉으로 표출되지 않고 안으로만 조여든다.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이기에 그 임을 생각하는 그리움의 고뇌는 안으로 응어리져 피맺힌 눈물을 이룬다. 따라서 귀촉도 의 울음은 바로 시인 자신의 애끓는 슬픔이자 사랑인 것이다. 1연에서 '아롱아롱' 하던 눈물 이 마지막에 와서는 내면으로 깊이 스며드는 피맺힌 눈물로 깊어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임의 떠남' → '화자의 회한' → '귀촉도 울음'이라는 기본 구조로 짜 여 있으며, 사랑의 본질, 더 나아가서는 생의 본질이 이 같은 비극적인 세계관에 바탕을 두 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이 시는 전 5행에 불과한 짧은 형식이지만, 언어의 관능적 용법과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으 로 대표되는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미당의 초기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먼저, 피 를 토하듯 우는 슬픈 울음을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로 표현한 데서 언어의 관능 적 용법을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꽃처럼 붉은 피가 배어나는 처절한 울음에서는 단순 한 감각적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인 체험 의식까지 갖게 해 준다. 그리고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은 '애기 하나 먹'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숨어 살며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문둥이'는 그저 '해와 하늘빛이' 서러울 뿐이 다. 그러므로 해와 하늘빛이 있는 대낮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을 갈 망하는 그는 살기 위한 원초적 욕망으로 '애기 하나 먹'음으로써 병을 고치려 하지만, 이 같 은 생에 대한 집념이 부도덕함을 깨닫고, 마침내 자신의 숙명적 운명에 대한 몸부림으로 인 하여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시인의 체험이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인간성이 파멸 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회복된 건강한 삶을 희구하는 그의 강한 생명 의식이 이 < 문둥이>를 낳게 한 것이다.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무서리 : 그 해의 가을 들어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경향신문}, 1947.11.9)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당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 는 명시의 하나이다. 국화의 개화(開花) 과정을 통하여 어떠한 생명체라도 치열한 생명 창조 의 역정을 밟고 태어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 주는 이 시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 因緣說) 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인(因)과 약한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이 시에서 도 국화 자체의 힘(因)과 소쩍새·천둥·무서리가 봄부터 가을까지 작용(緣)함으로써 국화 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여기서 국화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이자, 나아가 생명이 그러한 아름 다움으로 승화된 상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시적 자아의 '누님'과 같은 40대 중년 여인이 도 달할 수 있는 원숙하고 평온한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지만, 이러한 관습적 상 징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인은 생명 탄생의 고귀함과 원숙한 중년 여인의 불혹(不惑)의 미를 상징하는 창조적 상징의 차원으로 국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함축미를 지닌 국화의 개화를 위해서 외적(外的)으로는 소쩍새의 울음·천둥· 무서리 등의 협동이 필요했고, 내적 (內的)으로는 설움과 번민의 시련과 고통 등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국화는 마침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우게 되는 것이고, 무수한 괴로움과 역경을 극복한 인간은 거울 앞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투영, 성찰하는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무등(無等)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현대 공론}, 1954.8)
* 남루 : 헌 누더기. 옷 따위가 해져 지저분함 * 갈매빛 : 짙은 초록빛 * 지란 : 영지와 난초. * 눙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 쑥구렁 : 쑥이 자라는 험하고 깊은 구렁. 무덤.
이 시는 생명 현상에 대한 강렬한 탐구가 주류를 이루던 초기시의 특징에서 벗어나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다가선 서정주 문학의 제2기 대표작으로서 초기시에 보이던 강렬한 생명의 솟구침이 가라 앉고,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나아간 1950년대 작품이다. 1954년경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었던 그는 6.25의 상처와 물질적 궁핍이 극심한 가운데 무등산(無等山)의 크고 의젓한 자태를 삶의 모형으로 삼아 이 시를 썼다. 6.25 동란으로 인한 광주에서의 피난 생활은 인정이 메말라 허기지고 고달픈 삶이었다.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일 뿐 그 속에 있는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순수성까지를 덮어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바탕이다. 시인은 무등산을 묵묵히 바라보며 자신의 생활 철학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 주고 있다.
▶ 성격 : 낭만적, 전통적 ▶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심상 ▶ 어조 : 설득적 어조, 긍정적 어조 ▶ 표현 : 대유법, 의인법, 직유법 ▶ 구성 : ① 자녀를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름.(제1,2연) ② 휴식을 취하는 부부의 모습.(제3,4연) ③ 가난에 굴하지 않고 품위와 지조를 지킴.(제5연) ▶ 제재 : 가난.(생활의 어려움) ▶ 주제 : ① 본질적 가치에 대한 긍지와 신념 ② 가난을 이겨내 보고자 하는 신념과 긍지
광화문(光化門)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현대문학} 8호, 1955.8)
이 시는 광화문에서 광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 정신을 발견, 시화(詩化)한 작품으로 광화문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한국적 광명(光明)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북악산과 삼각산을 오누이에 비유함으로써 국토에 대한 혈연적 친근감과 다 정함을 표현, 국토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한편, '광화문'의 위치를 보여 주고 있다. 2연에서는 광화문의 숭고한 모습을 우리 민족의 광명 사상이 깃든 종교와 같은 것으로 파악 하고, 버선코와 지붕이 지나고 있는 전통적 곡선미와 결합시켜 그 자태가 의젓함을 표현하 고 있다. 즉, '광화문'이라는 하나의 건축물에서 민족의 사상을 '광명'을 찾아낸 후, 그것을 전통적 곡선미와 결합시킴으로써 버선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하늘로부터 오는 밝은 빛을 떠 받들고 사는 우리 민족과 '날갯죽지'(양쪽 기와지붕)에 푸른 광명을 의젓하게 싣고 있는 광 화문의 자태(姿態)를 예찬하고 있다. 3연은 2연의 부연 단락으로서 한국의 전통적인 미(美)를 하늘에 연결시켜 광화문 지붕 위에 그득히 고인 하늘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순결한 민족임을 강조하고 있다. 4연은 광명과 평화의 사상을 지닌 광화문의 상징적 의미를 말한 부분으로, 우리 민족이 항 상 어질고 고운 마음씨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5연 에서 시정의 노랫소리는 아직도 옛 노래처럼 정겹게 들리고,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본 낮달 또한 옛 하늘에서 보던 대로 여전히 하나의 신비스런 존재로서 우리 민족에게 광명의 대상 으로 떠 있는 것이다.
추천사(推韆詞)
춘향(春香)의 말·1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전(古典)인 고대소설 <춘향전> 속의 '춘향'이의 독백 형식으로 시적 모티프를 차용한 시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한국적인 정서의 원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천기의 딸로 태어난 춘향이 양반 관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도령과 맺어지기까지의 역경과 고난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며,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에로의 변형, 재창조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의 시적 형상화라 할 수 있으며, 춘향의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시의 화자가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연작시 3편 중 첫 번째 시이다.
▶심상 : 고전적, 동적 심상 ▶어조 : 여성적이며 섬세한 어조 ▶구성 : ① 1연 : 현실 초극 의지-(상징적 행위로 파악) ② 2연 : 아름다운 현실에의 애착과 초극 의지→자신을 제약하는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시어 '아주 내어 밀듯이'에 주목) ③ 3연 : 동경하는 세계에 대한 갈망 ④ 4연 : 인간의 운명적 한계 자각(인식) ⑤ 5연 : 현실 초극 의지→현실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세계를 다 시 벗어나려 함 ▶제재 : 그네를 뛰는 춘향 ▶주제 : ① 초월적 세계로의 갈망(지향 의지) ② 현실적 고뇌의 초극 ▶참고 : <한림별곡> 제8장 (그네뛰기 제재), 박재삼 시 <춘향이 마음 초(抄)2>
다시 밝은 날에
춘향(春香)의 말·2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가시고 그 훠 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이 시는 춘향이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뒤에 재회의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자신의 사랑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의 전통적 구성 방식에 향토 적 색채의 시어와 높임법의 문장를 구사함으로써 더욱 절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연은 춘향이가 '그'를 만나기 이전의 심리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였으며,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 초록 의 강 물결 /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다고 함으로써 사랑의 격정에 휩싸이기 이전의 평화롭던 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연은 '그'를 만난 이후, '미친 회오리바람'과 '벼랑의 폭포' 와 '소나기비'와 같은 열정에 빠진 자신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3연은 이별의 아픔을 겪은 후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 훠 ㄴ한 내 마음에'는 아직 '마지막 타는 노을'같이 뜨거 운 사랑이 타오르고 있지만, 재회를 기다리는 그 하루하루는 마치 '기인 밤'과 같다는 화자 의 애절한 고백을 통해 이별을 겪은 후의 아픔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떠나간 것은 단 순히 '그'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신령님께서 데리고 간 것이 라는 구절은, 화자가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해 준다. 4연은, 화자가 '도라지 꽃 같은 사랑'을 지키며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로 표상된 재회의 날을 기다리겠다는 화 자의 굳은 결의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결의는 '정절(貞節)'이나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와 같은 봉건적 윤리관의 반영이 아닌,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시공을 초월 해 존재하는 춘향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춘향 유문(春香遺文)
춘향(春香)의 말·3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꽃밭의 독백(獨白) 사소(娑蘇) 단장(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사조(思潮)} 창간호, 1958.6)
이 시는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사소 설화'를 변용하여 구도자(求道者)의 신앙적 염원인 영원한 절대 세계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사소'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神仙修行)을 떠난 일이 있는데, 이 시는 집을 떠나기 전, 집 꽃밭에서의 독백을 시화한 것으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 질의 한계성을 깊이 인식한 '사소'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부활을 갈망하는 구도 적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전 14행의 단연시로 내용상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인간 세 계의 유한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래가 좋기는 가장 좋아도 그 소리는 구름까지 갔다가는 돌 아올 수밖에 없고, 힘차게 달리는 말도 바다에 이르면 멎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 화 자, 즉 '사소'가 산돼지나 산새들에게 입맛을 잃어버렸다는 독백을 통하여 인간 세계의 유한 성을 말하고 있다. 2단락은 7∼11행으로 자연과 동화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드러 내고 있다. 핵심적 이미지인 '개벽하는 꽃'은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이 반복됨으로써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꽃'으로 상징된 자연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에 합일되려 하지만, 결국은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인 자신의 한계만을 자각할 뿐이다. 다 시 말해, 신선이 되고 싶어하는 '사소'는 열심히 선(仙)의 세계를 꿈꾸고 있으나, 그 때마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3단락은 12∼14행으로 영 원의 세계를 갈망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벼락'과 '해일'은 영원의 세계에 이르 기까지 화자가 극복해야 할 온갖 고통이나 형벌을 의미하며,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 아'라는 주술적 성격의 반복되어 나타나는 절규 속에는 영원의 세계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대지적 존재를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상승하고자 하는 화자의 희원(希願)이자, 결국은 이 시의 작자, 미당의 희원이기도 하다.
동천(冬天)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즈믄 : 천(千)의 옛말.
({현대문학} 137호, 1966.5)
3음보 율조의 5행 한 문장으로 된 이 시는 짧은 형식 속에 인간의 본질과 의미라는 무게 있 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체의 설명을 배제하고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구사함으로써 강렬 한 언어적 긴장을 이루고 있는 차원 높은 시가 되었다. 싸늘하면서도 유리같이 투명한 겨울 밤하늘 '동천(冬天)'에 초승달이 떠 있고, 그 한켠에 한 마리 '매서운 새'가 날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전부이다. 이 시는 화자의 행위를 나타내는 1∼ 3행까지의 전반부와 그에 대한 반응, 즉 새의 행위로 나타나는 반응인 4∼5행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행의 '고운 눈썹'은 초승달을 의미한다. 이 초승달이 화자의 마음 속에서 천 년 동안 맑게 씻긴 것임을 고려한다면, '눈썹'은 곧 사랑의 표상이다. 2행의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는 행위는 지금까지 겪어온 온갖 모순과 갈등을 투명화하는 작업을 의미하며, 3행의 '하 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는 절대적 경지로 비약하려는 행위로,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지향 하는 화자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4행의 '매서운 새'는 공격적 특성을 환기하는 시어로 차 가운 겨울 밤하늘과 어울려 그 '매서움'이 배가되고 있다. 그러나 '매서운 새'는 달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5행의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유순함으로 나타난다. 결국 새는 달을 공격하지 않는, '매서움'으로서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지 섣달의 밤하늘을 날며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매서운 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시의 평면적 의미는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임의 고운 눈썹을 천 년 동안 마음 속에 아로새겨 하늘에 옮기어 놓았더니, 동지 섣달 하늘을 나는 매서운 새가 눈 썹의 절대적 가치를 알고 비끼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운 눈썹'인 초승달이 '즈믄 밤의 꿈'으로 이어지는 것은 초승달이 여러 차례의 변신을 통해 최종 단계인 '만월'에 다다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초승달은 화자가 염원하는 동경과 구도의 상징물로서, 그가 추구하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임'(절대적 대상) → '초승달'(미완성의 상태) → '만월'(완전한 영원의 세계)의 순서로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매서운 새'는 '만월'인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매서운 새'가 현실 세계인 '동천'에 존재하며 끈질기게 영원의 세계인 '만월'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시늉하며 비끼어'가는 한계에 부딪 치고 말 뿐이다. 이렇게 이 시는 절제된 시어와 짧은 형식을 통해 절대적 가치에 대한 외경 (畏敬)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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