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관광(觀光)을 위한 것이다. 관광은 빛을 본다는 뜻이다. 빛은 문명이다. 문명을 보기 위해서 눈과 다리만 가서는 되지 않는다. 마음이 따라가야 한다. 마음은 글에 있다. 옛사람이 사랑한 땅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그 빛을 보아야 한다. 흔적조차 없는 인왕산 아래의 주택가에서 인왕산에 대한 장혼(張混)의 글을 읽고,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압구정(狎鷗亭)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옛 사람이 남긴 빛을 보기 바란다. 아름다운 산수를 그린 글을 읽으며 그곳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 들고, 지금 사라진 곳이라면 다시 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또 그럭저럭 살고 싶은 마음에 ‘상상의 정원’을 꾸밀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조상이 사랑한 삶에 대한 기억의 끈을 현대인들이 놓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옛 정신문화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대 국문학과에 재직 중인 한문학자 이종묵 교수의 ‘조선의 문화공간’ 서문에서 따온 말이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고서의 보고인 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 자료를 맘껏 뒤져 ‘옛사람이 살던 땅을 통한 조선시대 문화사’를 집대성해 네 권의 묵직한 책으로 엮었다.
|

|
|
◇세종대왕이 형 효령대군을 위해 지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의 정자 ‘희우정’, 단비가 내린 날을 기념하여 이름지은 것이다. |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美不自美 因人而彰).” 조선 후기 문인 장혼이 ‘옥계아집첩’(玉溪雅集帖) 서문에 적은 글귀다. 소세양(蘇世讓)은 “산과 물은 천지간의 무정한 물건이므로 반드시 사람을 만나 드러나게 된다”고 정자 현판에 써 붙이고,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이나 황주(黃州)의 적벽(赤壁)이 왕희지(王羲之)와 소동파(蘇東坡)의 붓이 없었더라면 거칠고 한산하며 적막한 물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었는가” 하고 읊조렸다.
여가를 활용해 아름다운 자연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은 현대인이나 옛사람이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옛사람, 그 중에서도 시화엔 능한 선비들은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산수를 찾아 한때의 흥겨움을 누리고, 그 추억이 사라질까 염려하여 시화로 흥감을 표현하고 글로 자세한 여정을 기록했다. 현대인들이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 하면서 어딜 가나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은 옛사람들의 기행 시와 기행문이 문명의 도구로 탈바꿈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각 권별로 ‘조선초기―태평성세와 그 균열’(1책), ‘조선중기―귀거래와 안분’(2책), ‘조선중기―나아감과 물러남’(3책), ‘조선후기―내가 좋아하는 삶’(4책) 등의 부제를 단 ‘조선의 문화공간’은 시대와 환경, 처지에 따라 무척 다양한 삶의 방식을 생생한 서사시와 격조 있는 풍경화로 담아냈다. 1책은 개국 후 태평을 구가하던 시기에서 각종 사화로 사람이 유배를 떠나는 시기까지를 다뤘다. 도성에 끌어들인 산수와 압구정·망원정 등 한강변의 누정들, 유배지, 그리고 강학의 공간 독서당을 살폈다. 2책은 선조 대에서 광해군 대까지 문화사에 자취를 남긴 중요한 인물과 관련한 공간을 다뤘다. 이 시기는 사림 정치가 본격화되던 때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한 귀거래와 그곳에서 수양에 힘쓰거나 풍류를 즐기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3책은 광해군과 인조 대에 영욕의 세월을 산 문인과 이후 17세기 사상계와 문화계를 호령한 명인들이 살던 땅에 얽힌 사연을 펼쳐보인다. 4책은 18∼19세기 문학과 학문, 예술을 빛낸 문인들의 이야기들이다. 벌열가의 화려한 원림에서, 궁벽한 땅에서 예술혼을 사른 사람들이 대비되는 가운데 세상을 구하고자 한 실학자들의 기백이 돋보인다.
조선의 문인들은 대개 정치가이면서 사상가이고, 또 시인이기도 했다. 때로는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혁명가였고, 때로는 은둔하며 심신을 수양하고 강학에 몰두하며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개국, 태평성대, 유배, 은둔, 강학 등 새로운 도전과 좌절, 꿈과 절망의 소용돌이를 살며 ‘조선’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만들어 냈다. 조식 이황 이이 서경덕 이언적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김안국 허균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서유구 등 87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재능이 뛰어나 붓끝으로 조선의 산하를 시와 그림으로 엮어냈다. 따라서 책 행간에는 문학 사상 예술 풍류를 아우른 조선의 사람과 땅, 그 시대의 문화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감칠맛 나게 담겨 있다. 무더운 여름밤 냉수에 발 담그고 조선의 선비들이 먼저 떠난 역사기행에 동참하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