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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을 찾아서

송강 정철 문학기행 - 제 1부 서울 청운동. 담양 환벽당

 

 

 

 

 

 

 

 

 

 

 

 이제 송강 정철 문학기행을  시작 합니다. 틈틈히 글을 올립니다.

 

 보시고 평가 부탁 합니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 송강 정철  문학기행


                  김세곤 (노동부 법무행정팀장)




길을 떠난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의 흔적을 찾아서 집을 나선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바 있는 사미인곡과  성산별곡이 만들어진 누정문학의 본향 담양을 간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광주로 가는 버스는  주5일제가 되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다. 차에 승객이 가득하다.  


차에서  강릉대 박영주 교수가 쓴 <고집불통 송강평전>책을 본다.

그러면서 송강과 창평(지금의 담양)과의 인연에 대하여 생각한다. 송강 정철. 1536년에 서울에서 태어나서 좌의정까지 벼슬을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 겨울에 강화도에서 58세로 쓸쓸하게 죽은 정치가, 문인.  그가  창평과  인연을 맺는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이다.


 그는 서울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4남3녀 중 가장 막내로 태어났다.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보면 ‘정철 선생 나신 곳. 이 언저리 장의동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이 태어난 곳’ 이라고 써진 표석이 하나 있다. 1988년 12월에 한국관광공사가 설치한 것이다. 그는 10살 때 까지는 제법 호사스럽게 살았다. 아버지 정유침의 벼슬은 별로였지만 큰 누나가 중종 임금 세자(훗날 인종)의 후궁이었고, 셋째 누나가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문정왕후 윤씨가  난 아들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도 소꿉동무로서 잘 어울렸다 한다. (명종은 송강보다 두 살 위이다.)


그런데 1545년 7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명종의 외척인 소윤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척인 대윤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된다.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은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인종이 죽은 후에 왕위를 계림군에게 넘기려고 했다는 무함을 한다.  물론 아무런 증거도 없었으나 이 소식을 안 계림군이 미리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바람에  혐의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는 안변 황룡산 기슭에서 삭발하고 스님으로 숨어 있다가 한 달도 못되어 체포된다. 그리고 능지처참을 당한다. 계림군의 처가인 정철 집안도 그 불똥이 튀어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정철의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으로 귀양을 갔으며 이조정랑이었던 정철의 큰 형은 광양으로 유배를 간다.


  일은 업친데 겹치는 것인가. 을사사화이후 2년 뒤(1547)에 다시 양재역벽서사건(소위 정미사화)이 일어난다. 양재역벽서사건은 척신 계열인 부제학 정언각이  봉투에 든 글 한 장을 문정왕후에게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 딸이 남편의 임지를 따라 전라도를 가기에 전송하려고 과천현의 양재역에 갔다가  익명의 벽서를 보았습니다.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이 사건 역시 소윤이 꾸민 공작정치였으나,  문정왕후의 외척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한다. 이 여파로 정철 집안은 또 다시 고난의 길을 가게 되는 데 그의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그의 큰 형은 다시 붙잡혀 와서 매를 맞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는다.


정철은  1545년 을사사화이후 1551년 아버지의 유배가 풀릴  때 까지 6년간을 공부도 제대로 못 배운 채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유배가 풀리자 16세의 정철과 그의 가족은 조부의 묘가 있는  창평 지실마을로 이사를 온다. 여기에서 송강은 27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 까지 11년간을 창평에서 산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좋은 스승들을 만나 학문도 배우고 시도 쓰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송강은 벼슬을 하면서  4번이나 낙향하여 창평에서 지낸다.

처음 낙향은  1575년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이 무렵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이 본격화되어 송강은 서인으로서 동인과 대립하였는데  그만 창평으로 낙향을 한다. 그리고 1577년까지 2년간 창평에 머무른다.  이때 그는 <성산별곡>을 지었다 한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



  


두번째는 그의 나이 44세 때인 1579년 8월부터 1580년 1월까지 5개월간이다. 송강은 이 낙향 이후 선조로부터 강원도관찰사 벼슬을 제수 받는데  <관동별곡>의 첫 머리에는 이 당시의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어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세 번째 낙향은  그의 나이 46세때. 1581년 6월부터 1581년 12월까지 6개월간이다. 그런데 그는 낙향 이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9개월간 일한다.


네 번째의 낙향은 그의 나이 50세 때이다. 그는 대사헌으로 일하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임금이 특사한 총마를 타고 출입을 하여 총마어사로 부르기도 하는 등 권세를 누렸으나 ,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난 후  서인의 중심인물이 된 그는 동인의 논핵을  받아 처음에는 경기도 고양에 머물렀으나 끝내 1585년 8월에 창평으로 내려 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송강정을 고쳐 짓고 송강정에 주로 머무르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짓고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가사에 나타냈다. 그는 1589년 10월 초까지 4년 동안 창평에 머물렀다. (그는 1589년 10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우의정으로 발탁되고 정여립 사건의 조사책임자가 된다. 이 사건은 일명 조선시대 광주 5.18이라고 불리는 데, 이발, 정개청등 전라도의  동인들이 많이 희생을 당하였다.)


한편 나는 송강 정철이 살았다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지실마을)을 미리 살펴본다. 창평의 진산인 장원봉의 남쪽 언덕이 성산(한글로 별뫼)이며, 이  성산 아래 기슭과  그 아래 창계천변(자미탄 이라함)에는 이름난 정자와 원림이 많다.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등이 그 대표적이고, 거기에서 서북쪽으로  20여리 가면 송강정과 면앙정이 있다. 



첫 행선지로 환벽당을 가다.



차에서 송강관련 책을 읽고 나니 어느 덧 광주에 도착한다.

시간이 벌써 오후 1시. 당일  코스라서  나는 서둘러서 맨 먼저  환벽당으로 간다.  이곳은 송강 정철이 환벽당 주인  김윤제 밑에서 공부를 배운 곳이다.



 환벽당은 광주에서 광주호를 지나 소쇄원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지실마을 입구에서 원효교를 건너자마자 곧바로 왼편에  있다. 거기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고 성산별곡의 한 부분이 써진 자연석이 있으며 개울이 흐르고 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개울  물이 꽤나 불었다.  나는 여기에서 조그만 사립문을 통과하여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툭 터진 곳이 나오고 거기에 별당 한 채가 있다.


별당은  방 한 칸과 마루가 있으며 <환벽당(環碧堂)>이라고 써진 현판이 붙어 있다. 힘이 있는 필체가 인상 깊다고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환벽당 옆에는 살립집이 또 하나 있고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 꽤나 넓다. 이곳에서  보니 무등산과 성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 개울이 흐르고 있어 꽤나 풍광이 좋다.



나는 환벽당 안내판을 자세히 살펴본다.




환벽당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호

                         소재지 : 북구 충효동



   조선 명종때 사촌 김윤제(1501년-1572년)가 세운 정자이다. 푸르름을 사방에 둘렀다는 ‘환벽당’이라는 이름은 신잠이 지었다고 한다. 나주목사등을 지낸 김윤제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곳으로 정철이 벼슬길에 나아가기까지 머무르며 공부하였다는 유래를 간직하고 있다.

  정자안에는 송시열이 쓴 환벽당 글씨와 더불어  임억령, 조자이의 시가 걸려 있다. 가까운 식영정, 소쇄원과 함께 ‘한 마을의 세 명승’이라 일컬어진 문학 활동의 주요 무대로서, 송순, 김인후,  김성원, 정철, 백광훈등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정자 아래에는 김윤제와 정철의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전설이 서린 조대와 용소가 있다.


  


환벽당 주인 사촌 김윤제(1501-1572). 그는 이곳 광주 충효리에서 태어난 이 지역 토박이다. 그의 종손이 임진왜란때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1568-1597)이며  광산김씨 문중으로서 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단다. 그는 153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등을 거쳐 전주감영 병마절도사, 부안군수 , 나주목사등을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1545년(명종1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그는 나주목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고 유유자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제자가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이다.


안내판에 써진 대로 김윤제와 정철의  처음 만남에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551년(명종6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별당 아래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너무나  꿈이 생생하여 잠에서 깨어 용소로 내려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정철이었다. 16세의 정철은 어머니와 함께 순천에서 사는 둘째형 소 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둘째 형은 을사사화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보자 세상에 염증을 느껴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처가인 순천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너무 더워서 그는 이곳 자미탄(백일홍 꽃 개울)의 용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여 보니 그의 기상이 너무 좋고 똑똑하여 크게 될 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정철이  순천에 가는 것을 포기시키고 자기 밑에서 공부를 가르친다. 6년간 아버지를 따라 힘든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어릴 때 왕족들과 같이 놀던 고귀한 품위가  정철에게서 배어나와 김윤제의  눈에 띠였으리라. 


정철은 이렇게  김윤제를 만나게 됨으로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정철은 김윤제의 조카  서하당 김성원(1525-1597)과 같이 김윤제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17살에는  김윤제의  외손녀 외동딸 문화유씨와 결혼도 하였다. 그리고 처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도움도 받는다.


김윤제의 사위인 유강항은 처음에는 정철과 자기 외동딸과의 결혼에 탐탁하지 않았다 한다. 객지에서 온 정철에게  외동딸을 성큼 내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김윤제는 이 결혼을 꼭 성사 시키고 싶었나 보다. 사위가 시큰둥하자 김윤제는 사위와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유강항은 장인의 강경함에 당황하여 결국 결혼 승낙을 하였다 한다.  김윤제가 무엇 때문에 정철을 이렇게 잘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정철이 그의 은혜를 너무 많이 입은 것은 틀림없다. 


한편  무등산 아래에서의  김윤제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는 재산도 많았다 하며 (환벽당과 성산 지곡마을  사이의 개울에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가 금다리라고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 감사가 나오기도 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당시에 내노라 하는 사람들과 인척을 맺었다. 우선에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1503-1557)가 그의 처남이었고, 호남의 사백(詞伯: 시를 잘 짓는 대가) 임억령(1496-1568)은 김성원의 장인이었다. 또한 그의 처남 양산보와  도학과 절의의 선비 김인후(1510-1560)와는 사돈 간이고, 양산보와 <면앙정가> 가사를 지은 송순(1493-1583)과는 이종간이어서 김윤제는 이들과  같이 잘 어울렸다 한다. 


따라서 환벽당은 김윤제, 송순, 김인후, 양산보,  임억령등   호남가단 1세대들이 잘 어울려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고,  술도 마시고 자연을 벗 삼은  곳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환벽당 마루위로 올라가서 벽에 걸린 편액 두 개를 본다. 하나는 석천 임억령의 환벽당 한시이고 다른 하나는 조자이가 이곳을 들러서 쓴 글이다. 먼저 석천 임억령의 한시 중 앞부분만을 읽어 본다.



환벽당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 지

모래가의 죽여(대나무 가마)소리  울리고 있네.


環碧堂


烟氣兼雲氣   琴聲雜水聲

斜陽乘醉返   沙路竹與鳴



이 시는 자연을 벗 삼아 거문고 타고 술 마시는 유유자적한 모습을 그린 시이다. 환벽당은 안개와 구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거문고 소리는 물소리와 겹쳐서 나고, 술을 마시다 취객은  다시 돌아가고 모랫길에서 대나무 가마소리만 들린다. 취객은 시를 쓴 석천 자신이다. 아마 석천은 500미터도 안 떨어진 식영정으로 돌아갔으리라.이 시에는  사촌과 석천이 같이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즐겼던 모습이 절로 보인다.  

     *    글이 2부로 계속 됩니다.                        


                               (2006.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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