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 조선
선조때의 시인이며 정치가. 그의 흔적을 찾아 문학기행을 하는 것은 어느 역사기행보다도 더 의미가 있다.
그의 생애는 파란 곡절이 많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왕가와 친족이라서 궁궐 출입이 자유롭게 호강스럽게 산 그이지만 10세 때 을사사화(1545년)로 집안은 쑥대밭이 되고. 16세에 부모를 따라서 죽림의 고향 담양 창평에 내려와서 당대의 최고의 문인들에게 공부를 배우는 행운을 얻고. 김윤제의 제자가 된 후에 김인후 기대승 송순 임억령에게서 시와 학문을 배우고.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 승승장구 하다가 몇 번의 아픔을 겪고 그리고 창평으로 낙향을 하고,
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 1585년에 다시 창평으로 낙향 1589년에 정여립 사건으로 다시 서인 정권의 핵심이 되었는데 1591년에 세자로 광해군을 옹립하려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강계땅으로 유배를 간다.
그런데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터진다. 다시 선조는 정철을 부르고 체찰사가 되어 전란중에 충청도와 전라도를 독려한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데 이것이 탄핵의 빌미가 될 줄이야.
결국 58세의 나이로 쓸쓸히 은거하다가 1593년 음 12.18 외롭게 강화도 송정촌에서 일생을 마친다.
송강 정철의 문학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송강가사이다.
송강가사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등이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관동별곡을 <우리나라의 이소>라고 칭송하였다.(이소는 초나라 굴원이 쓴 대서사시이다.) 특히 김만중은 속미인곡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장 능란하게 구사한 가사로써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송강 정철(1536-1593)의 생애를 그의 문학과 관련하여 보면
그의 가사중에 성산별곡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산별곡을 만든 해는 어떤 글은 25세, 40세, 40-44세, 50세 이후로
여러 설이 있으나 담양 창평에 두 번째 낙향한 40-44세 경이 유력하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
인생 세간의 좋은 일 하건마는
어디한 산중에 들고아니 나시는고
(후략)
두 번째 가사가 관동별곡이다. 그의 나이 45세에 1580년에 그는 죽림(창평)에 누웠다가 선조임금의 명에 의해 강원도 관찰사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내외금강, 관동8경을 돌면서 기행 가사를 쓴 것이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8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후략)
그리고 지방주민들을 교육시키는 훈민가 12수도 만든다.
세 번째 가사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다.
이 가사는 송강이 대사헌을 그만두고 다시 창평에 네 번째로 낙향한 1585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 1587-1588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 가사는 사미인곡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뒤에 속미인곡이 만들어 졌다. (이 둘을 합하여 전후미인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미인곡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점어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후략)
속미인곡
저 가는 저 각시 본듯도 한더이고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다며 저문날에 누굴보러 가시는 고
(후략)
또 한가지 그의 작품 중에 돋보이는 것은 장진주사이다. 술꾼인 그가 지은 이 시조는 권주가로 잘 아려져 있으며, 세상의 덧없음이 배어있다.
장진주사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궁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우에
거적 덮어 주리혀 매어가나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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