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일손의 후손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30회 실록청 당상 이극돈의 상소(4)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30회 실록청 당상 이극돈의 상소(4)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5.06.11 18:55
  •  댓글 0
 

 

 

실록청 당상 이극돈(1435∼1503)의 상소는 계속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이목(1471∼1498)이 국상(國喪) 초에 으뜸으로 벽불(闢佛 불교 배척)을 제창하여 소(疏)를 올렸는데, 많이 불경(不敬)하므로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27일 이후에 마땅히 묻겠다.’ 하셨는데, 마침 그날에 여러 정승과  육조가 다 빈청(賓廳)에 모였습니다. 좌중에서 사사로이 하는 말들이 ‘미친 아이의 일이라 족히 헤아릴 것이 못 된다.’ 하므로, 신은 ‘그렇지 않다. 대저 비록 여염의 소민이라도 서로 싸우고 꾸짖을 적에 혹시 말이 그  부모들에게 미치면 반드시 성을 발끈내어 원망을 가하는 법인데,  하물며 나라 임금의 어머님이시랴? 상소 가운데 두 분 대비를 지적한 말이 극도로 불경스러우니, 주상께서 묻고자 하심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비록 미친 아이일지라도 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는데 어찌 미친 아이라 하여 그만둘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에 신이 정청(政廳)에서 참판·참의 및 도승지 김응기와 더불어 함께 앉아 있었는데, 승정원 서리가 와서 김응기에게 유생(儒生)을 정죄 (定罪)했다는 기별을 고해 주므로, 신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정죄한 것은 과한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 빈청에서 말하던 바로써 말했습니다.

그 후에 신이 윤효손·성현과 함께 빈전도감(殯殿都監)으로 있었는데,   호조판서 홍귀달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 정승이 일로 인하여   빈청에 와서 유생의 일을 계청(啓聽)하였으니, 육조에서도 역시 청해야 할 것이다.’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내 의사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미 내 뜻을 빈청에 말하였고 또 정청에도 말했는데, 지금 계청을 한다면, 전일에 내 말을 들은 재상들이 나더러 번복한다 할 것이다. 지금 과거 시험 응시를 정지시키는 벌을 내린다 할지라도 이들은 다 문장에 능한 자라, 만약 시험이 있게 되면 주상께서 반드시 시험에 응할 자격을 허하실 것이요, 만약 허하지 않으실 경우에는 그때 가서 우리들이 청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홍귀달이 다른 육조들과 더불어 계청을 했으나, 윤허를 아니 하시니, 이목 등이 신이 재삼 한 말을 듣고서 극도로 원망하였습니다.”

여러 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이목등 유생의 상소에 대하여  불문에 처하자고 하는데 유독 이극돈만  유생들을 처벌하자고 한 것이다.

창덕궁 희정당 전경 
희정당 
희정당에서 바라 본  빈청 (지금은 카페)
창덕궁 배치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494년 12월 24일에 성종 임금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훙(薨)하였다. 춘추(春秋) 38세였다. 

‘대조전 일원’ 안내문
대조전

이틀 후인 12월 26일에 연산군이 성종을 위하여 수륙재(水陸齋 불가 佛家에서 물·육지의 여러 귀신에게 음식을 차려 주고 경을 읽는 행사)를 올리려 하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강백진(康伯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의손(李懿孫)이 거행하지 말도록 아뢰었다.

“대행왕(성종)께서 일찍이 불법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지금 신정(新政)의 처음이어서 신민이 좋은 정치를 바라는 시기이니, 사도(邪道)를 버리고 예문을 좇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자 연산군은 "선왕께서 어찌 다 불법을 좋아하셨으랴마는, 수륙재의 거행은 조종조로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대행 대왕께서도 그만두라는 유명(遺命)이 없었으니, 폐지할 수 없다."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이 수륙재를 올리려 하자, 12월 27일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표연말·전한(典翰) 양희지·응교(應敎)권주·부응교(副應敎) 홍한·부수찬(副修撰) 김감(金勘)이 성종을 위하여 불재를 지내지 말 것을 서계(書啓)하였다.

1495년 1월 1일에 승정원(承政院)도 수륙재 지내는 것을 허락치 말도록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따르지 않았다.

1월 3일에 성균관 생원 조유형(趙有亨) 등이 상서(上書)하여 불공(佛供)하는 것이 불가함을 논하니, 연산군은 "대간의 말도 윤허(允許)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의 말을 어찌 들을 수 있으랴면서 책임을 묻겠다“고 전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산군은 1월 22일에 생원 조유형 등 157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유생들이 갇히자 대간(臺諫)과 신료들이 나서서 국문(鞫問)하지 말도록 간언하였다. 승정원에서도 "대행왕(大行王 성종)께서는 언사(言事)하는 사람에 대하여, 말이 채택할 만하면 따르시고, 비록 채택할 만한 것이 못되더라도 그들을 죄주지 않으셨습니다. 26년 동안 사기(士氣)를 배양하시어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대간(臺諫)·시종(侍從)·태학생(大學生)으로 마음에 품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상달하여 말을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언사(言事)를 당하여 문득 추국(推鞫)하라고 명하시니, 원근간에 누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가두지는 말고, 말한 연유만을 물으라."고 한 발 물러났다.

연산군이 추국을 계속하라고 전교하자, 홍문관이 유생을 추국함은 타당치 못하다는 일을 논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대간이 상차(上箚)하여  “유생을 추국하고 이조(吏曹)를 국문하지 않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하였으나, 연산군은 역시 듣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이극돈은 대신들과 대간의 편에 서지 않고 연산군을 편들었다.
1월 26일에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정희량은 중형에 처하여 장(杖) 1백 도(度)에 유(流) 3천 리의 형에 처하고, 이목·조유형·임희재·이광좌·안석복·김협 등은 수종(隨從)하였으므로 1등(等)을 감하여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게 하소서."

이에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정희량·이목·이자화는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 조유형 등 21인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의금부는 1월 27일에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등 21인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하지만 1월 27일에 대간과 홍문관이 유생을 죄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계하였고, 1월 28일에도 직제학 표연말 등 대간과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 등 홍문 관원들이 유생을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간언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월 30일에는 병조판서 성준 · 호조판서 홍귀달 · 예조판서 성현 · 병조참판 권건까지 나서서 간청했으나 연산군은 강경했다.

한편 연산군은 유생들을 죄 준 후 4개월 만에 "정거(停擧)한 유생은 과거 응시를 허용하고, 유배 보낸 유생은 그대로 정거하라."고 전교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5월 22일)

이제 상소는 마무리된다.

“그 밖에도 이 무리들이 나를 원망하고 나를 꾸짖은 욕설을 어찌 다 성명하신 전하께 아뢰오리까. 신의 나이 70이 가까운데 젊어서부터 사람들을 해롭게 하거나, 신이 탐욕부리는 일이 없사온데, 유독 김일손·이목·임희재에게만 사사로운 원한이 있을 리 있사오리까.

신이 이미 죄과를 범했사옵고 또 사람의 훼방을 입었사옵기로, 신경이 착란하여 말의 지루함을 망각하였사오니, 개운하지 못하고 번거롭게 한 죄는 피할 길이 없사옵니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 전문 강사> 

 

▲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2011.9-2013.6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대한제국망국사 (2023년)>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 (2023년 비매품)>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