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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천 박광전

죽천 박광전 기행 14, 장윤 진주성에서 순절, 김세곤 글

제14회 전라좌의병 부장 장윤, 진주성 2차 싸움에서 순절하다. (1)
작 성 자 김세곤
일 자 2011년 12월 26일
1593년 4월 들어 임진왜란의 판세는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1월초에 명나라가 개입하여 평양성이 탈환되었고, 2월 중순에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이기자 일본은 상당히 위축된 상태이었다. 왜군은 서울에서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었다. 반면에 가토는 함경도에서 임해군과 순화군을 인질로 잡아 기세등등하였다. 명나라는 서울에 있는 왜장 고니시에게 서울을 비워주라고 통고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왜군을 몰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럴 즈음에 왜장 고니시는 명나라 와 모종의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명나라에게 서울을 자진 철수하면 왜군들이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명군은 그 조건을 수락한다. 마침내 왜장 고니시는 4월18일 용산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 2만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울에서 철수한다. 명군은 조선군에게 일체 군사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치를 내린다. 참, 어이없게도 왜군은 조선군의 습격 하나 받지 않고 고스란히 부산에 집결한다. 5월 말경에는 10만 명 정도의 왜군이 부산에 모여들었다.

이는 또 다른 액운을 잉태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격을 준비한 것이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초기에는 승승장구하던 왜군이 주춤하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것은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현지에서 군량을 확보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계획이었는데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자 군량 조달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차질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1592년 10월에 치른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패배이었다. 3만 명의 왜군이 3,800명의 조선군에게 패배한 것이다. 도요토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시 진주성(일본은 진주목사 김시민 때문에 패전하였다 하여 이 성을 목사성이라 불렀다.)을 점령하도록 명령한다. 그는 2월부터 5월 사이에 세 차례나 명령서를 보낸다. 그 요지는 진주성을 점령한 뒤 경상도, 전라도를 정복하고 장기간 머무를 성을 쌓을 것이며 진주성에 있는 사람은 씨를 남기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5월에 도요토미가 보낸 세 번째 작전지시서를 읽어 보자.

o 목사성(진주성을 말함) 공략은 흙주머니와 죽창을 만들도록 명하고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임할 것이며, 한명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일 것
o 그렇게 한 후에 전라도로 출진해서 승리하도록 할 것.
o 전라도로 출진해서 완전 토벌 한 후, 성들을 견고하게 만들고 군사의 다소에 따라 성의 크기를 결정하고, 장소도 검토하여 각자 소유할 것.

왜군은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 전투를 준비하였다. 왜군은 제1대에서 6대까지 편성하였는데 1대는 가토, 2대는 고니시, 3대는 우키다등이 맡았다. 병력은 10만 명이었다.

이런 움직임이 명나라 군대에 전하여 졌다. 협상을 주관하면서 부산까지 따라 내려 온 명나라의 심유경은 너무 놀라서 왜군 교섭 대표인 고니시에게 항의하였으나 고니시는 가토가 한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성을 비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엄포도 놓았다. 심유경은 다급하게 서울로 올라오면서 선산에 있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진주성을 비워주라고 말하였다. 명나라 총대장 이여송도 이 보고를 받고 유정 등에게 진주성으로 내려가 구원을 하라고 지시하였으나 이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출전하지 않았다.

한편 순변사 이빈과 전라감사 권율등도 진주 근처에 갔으나 왜군들이 진주로 다가오자 흩어져서 다른 곳으로 옮기고 말았다. 의병장 곽재우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진주성내로 들어가지 않고 외곽에서 지원하기로 작정하였다.

조선군은 왜군의 기세에 눌려 진주성을 비우자는 입장이었지만, 남하하는 적을 추격하여 진주 근처에 온 창의사 김천일만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진주는 호남으로 통하는 요충지라는 점을 역설하면서 진주가 왜군의 손에 들어가면 호남도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왜군은 호남에서 군량을 확보하게 되어 전쟁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김천일의 주장에 호응하는 장수들은 경상도의 몇 몇 장수와 전라도 의병장들 뿐 이었다. 창의사 김천일, 전라우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경상우병사가된 최경회, 그리고 충청병사 황진, 전라좌의병 부장 장윤, 복수의병장 고종후와 태인의병장 민여운, 순천의병장 강희보와 강희열, 영광의병장 심우신, 적개의병장 변사정의 부장 이잠, 거제현령 김준민, 김해부사 이종인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에 집결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합하여 3,500명 정도였다.

전라좌의병의 부장 장윤도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의 허락을 받고 보성사람 남응개, 김대민, 김신민 등 의병 3백명을 데리고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진주성 안에는 진주 성민을 비롯하여 인근에서 몰려든 백성들로 북적거렸다. 어림잡아 6만 명은 되었다. 다행히 성안에는 10만석의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다.

김천일은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여 진주성을 지킬 부대편성을 다시 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이 총대장이 되고.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우도절제사, 충청병사 황진이 수성장을 맡았으며 각군 부장은 장윤, 양산숙, 민여운,이종인,김준민,고득뢰,강희보이고, 전투대장으로 강희열, 심우신, 임희진, 문홍헌 등이 4대문에 각기 배치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은 6월21부터 6월29일까지 9일간에 걸친 전투였다. 그러면 9일간의 싸움을 간략히 살펴보자.

6월15일

왜군이 김해와 창원을 거쳐 함안으로 밀려오자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권율, 이빈, 선거이 등의 군사가 흩어져 달아났다. 권율의 부대는 남원으로 돌아가고 의병장 곽재우는 정진(鼎津)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6월 21일


드디어 왜군 선봉대 기병 2백 명이 척후활동을 시작하였다.


6월22일


왜군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안에서 사격하여 1진을 물리쳤으나 2차교전은 초저녁부터 2경까지 3차 교전은 3경부터 시작하여 5경이 되어서야 그쳤다. 왜군은 참호의 물을 빼내고 흙으로 메워 큰 길을 만들었는가 하면 곧장 성 밑을 파서 장대(墻臺)의 큰 돌을 운반해 내갔다. 성 위에서 시석(矢石)이 어지럽게 떨어졌으나 왜적은 죽음을 무릅쓰고 모여들어 꼭 허문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다.





6월23일

낮에는 세 차례 전투에서 세 번 모두 물리쳤으며, 밤에는 네 차례 접전하여 모두 물리쳤다.


6월 24일

왜군은 마현에 5-6천명을 동편에 5-6백명을 추가로 배치하였고 치열하게 싸웠다. 성 안팎에 죽은 자의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6월 25일

적이 동문밖에 인공 토산을 만들고 그 위에서 성을 굽어보며 총탄을 발사하였다. 성안에서도 마주 대하여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수성장 황진이 직접 흙을 져 나르고 쌓는 일을 도와 하룻밤에 끝마쳤다. 그리하여 서로 마주 바라보고 현자총통을 쏘아 토산을 파괴하니 이내 적이 물러갔다.

6월 26일

왜군은 새로운 전술을 시도하였다. 군사들이 큰 나무 궤작위에 쇠가죽을 입힌 뒤 그것을 방패삼아 성벽 밑으로 육박해 돌격하는 전술이었다. 이 방법으로 성 밑까지 접근해 성벽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비 오듯이 활을 쏘고 큰 돌을 연달아 굴러 내려서 왜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왜적은 큰 나무 두 개를 동문 밖에 세우고 그 위에 판옥(板屋)을 만든 뒤 성안으로 불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 불화살이 성안의 초가에 떨어져 화염이 자욱하였다. 수성장 황진도 마주 보고 나무를 세우고 판자집을 만든 뒤 대포를 쏘아 왜군의 판옥을 무너뜨렸다. 성안 사람들이 물을 길어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이날 거제현령 김준민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다가 죽었다. 아군 장수 가운데 최초의 희생자였다.


6월27일


왜군은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대나무로 방책을 만들어 그 위에서 총탄을 발사하였다. 성안의 군사 300여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왜군은 귀갑거를 이용해 성밑으로 점근해 쇠망치로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조선군이 섶에 기름을 붙여 귀갑거를 태우자 왜군이 퇴각하였다.

왜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겁을 먹고 허둥거리며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였다. 김천일은 장윤을 임시로 목사에 임명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때 큰 비가 내려 활의 아교가 모두 풀리고 군사들은 먹고 잠잘 겨를도 없어 점점 피로의 기색이 짙어져 갔다. 이에 반하여 왜적은 많은 군대로 교대하며 싸웠기 때문에 병사들이 생기가 돌고 용맹스러워 지르는 함성이 우레와 같았다. 왜적이 성안에 글을 보내기를, “대국의 군사도 이미 투항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겠는가.”하였다. 성안에서도 글로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명나라 군사 30만명이 지금 진격 중이니 너희들은 섬멸되고 말 것이다.” 하니, 왜적이 아랫도리를 벗어 붙이고 야유를 하면서 “명나라 군사는 벌써 물러갔다.” 하였다. 김천일은 높은 데 올라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모방(某方)에 병기(兵氣)가 있으니, 명나라 군사가 곧 와서 구원할 것이다.”하였다.

이날 밤에 또 크게 싸우다가 5경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6월28일


이날 밤 적이 다시 북문을 침범하여 성문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이곳은 서예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왜군이 성을 뚫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으므로 성이 장차 무너지려 하였다. 적이 바야흐로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왔는데, 김해부사 이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적이 또 동쪽과 북쪽의 성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다시 크게 싸워 물리쳤다. 황진이 순찰차 이곳에 이르렀다가 성 아래를 굽어보고 말하기를, “적의 시체가 참호에 가득하니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은 되겠다.” 하였다. 이 때 왜군 한 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황진의 이마에 맞았다. 황진은 용략(勇略)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안에서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안이 흉흉해지며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날 황진의 죽음을 조문하는 듯 장맛비가 음산하게 내렸다.

 

진주성  창렬사   이곳에  장윤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