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박광전, 보성에서 전라좌의병을 일으키다.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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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 김세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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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 2011년 11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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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화산재_미력_사곡.jpg [1130]Kbyte / 다운로드[6]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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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박광전, 보성에서 전라좌의병을 일으키다. (1) 2011.10.18 임진왜란은 조선 개국 200년 이래의 최대의 사건이었다. 조선의 평화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 장군 소서행장은 전선 7백 척, 왜군 2만여 명을 이끌고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귀신과 같은 신식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부산과 동래를 이틀 만에 함락시키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서울로 곧장 진격하였다. 이후 왜군은 조선에 가등청정의 2만 2천명, 흑전장정의 1만 1천명 등 22만 명의 왜군이 속속 상륙하였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전쟁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전쟁을 하려니 군사 몇 백 명도 구하기 힘들었다. 조선은 맹장 신립을 충청도에서 싸우도록 한다. 그러나 가장 믿었던 장수 신립도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왜군에게 패배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4월29일 밤에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간다. 전쟁이 일어난 지 20일도 채 안 된 때이었다. 선조는 개성도, 평양도 버리고 6월22일에 압록강변 의주에 도착한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5월3일에 한양을 무혈입성하고 평안도와 함경도도 쳐들어가서 조선 전역을 접수한다. 다만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 지역만은 무사하였다.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은 전라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옥포 해전, 한산도 해전, 부산 해전들을 통하여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영남의 곽재우와 김면, 호남의 김천일, 고경명 그리고 충청의 조헌 등은 죽음도 두려워 않고 왜적과 싸웠다. 그런데 담양에서 거의하여 6천명의 의병을 모은 의병장 고경명은 아깝게도 1592년 7월10일 금산전투에서 순절하고 만다.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10일 뒤인 7월20일, 전라도 보성 관아에서는 임계영(任啓英 1528-1597)을 의병장으로 한 전라좌의병이 결성되었다. 임계영은 진보현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55세의 나이로 향리에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고경명이 금산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기를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내가 죽을 곳을 얻었도다.” 하고 왕자사부 박광전, 진사 문위세, 능성현령 김익복과 함께 보성 관아에 모여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한편, 전라좌의병 결성에 실질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죽천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81년에 광해군의 공부를 가르치는 왕자사부에 임명되었다. 그 뒤 사헌부 감찰, 함열 · 회덕 현감을 역임한 뒤 1589년 향리에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힘쓰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은 6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격문을 써서 여러 열읍에 돌리고 의병을 모집한다. 이 격문은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에 있는데 <죽천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면 박광전이 쓴 격문을 읽어 보자 7월 모일에 전라도 전(前) 현감 박광전, 임계영등은 능성 현령 김익복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통문을 돌립니다. 아! 국가가 의심 없이 믿고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하삼도(下三道)인 경상, 충청, 전라도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도와 충청도는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모두 오직 전라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일으켜 세울 기틀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요즈음 서울이 위급하다 하여 순찰사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있고, 병사(兵使)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을 넘었으며, 두 의병장(김천일과 고경명을 말함)의 진 역시 각기 근왕(勤王)을 위하여 이미 전라도를 떠났습니다. 열읍의 장사(將士)들도 장차 나가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몇 명 없으므로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의 방비가 극히 허술하고, 호서의 적이 이미 본도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席卷)의 형세가 장차 이루어질 터인데 극복할 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국가의 일이 너무도 위태하여 진실로 통곡할 일이니, 이 때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왜적이 성 밑에 당도하여 우리 장정들을 무참히 죽일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생이 몸 둘 곳이 어디며 가족들은 어느 곳에 보내야 한다는 말입니까. 영남이 이미 이렇게 당한 것을 우리는 이미 귀로 들었고 눈으로 보았으니, 산중으로 도망가 숨을 수도 없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할 길도 없어서 우리는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기왕 죽는 것이라면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만에 하나라도 중요한 길을 잘 막아 왜적의 기세를 저지시킨다면, 사지(死地)에서 살아나는 것이요, 부끄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이 때인 것입니다.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도망친 군졸이 있을 것인즉, 만약 식견 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격려해서 힘 모아 일어나 스스로 일군(一軍)을 만들어 왜적이 향하는 곳을 감시하여 요충지를 굳건히 지킨다면, 위로는 왕의 군사를 성원할 수 있을 것이요, 아래로는 한 지역 백성의 목숨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힘껏 도모하여 영남 사람들처럼 되지 맙시다. 영남 사람은 왜적을 만난 초기에,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막아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머리를 싸매고 쥐처럼 도망 쳤으니, 그것이 비록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데서 나온 일이었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반드시 후회가 되는 일입니다. 왜적의 기세가 등등하여 가옥들이 불에 타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한 뒤에야 영남의 의사(義士)들이 분연히 일어나서 많은 수의 왜적들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조금 마음이 든든하다 하겠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나태한 습성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 기약한 날짜에 뒤지지 않게 달려 오십시요. 우리들은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가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니, 지휘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는 허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먼저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는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사(勇士)의 기운을 분발하자는 바이니, 사람 마음이 한 가지 (人心所同然)인 것은 일찍이 사라진 적이 없으니 반드시 떨치고 일어날 사람들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즉시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온 고을에 알리고 깨우쳐서,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 달 20일 보성 관아의 정문 앞으로 모이십시오. 한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임금이 치욕을 당했는데도 구원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처음과 끝을 생각하여 창의할 것을 여러분은 도모하십시오. 이리하여 7월 20일 보성관아에 700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 날 전라좌의병은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문위세를 군량을 모집하고 보급하는 일을 하는 양향관에, 박광전의 큰 아들 박근효를 참모관에, 정사제를 종사관에 임명하는 등 군사조직을 갖추었다. 군대의 깃발은 호랑이 호(虎)자로 장표(章標)를 삼았다. 호(虎)자 장표는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새겼다. 유효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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