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47. 권율,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1) |
입력시간 : 2011. 10.24.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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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 성책·투석전 등 갖추고 본격 전투 준비
대오 단속·한양 주둔 군사 동원 섬멸 결의
1593년 1월8일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4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1월27일 백제관 전투에서 어이없이 왜군에게 패배해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여송은 한양을 수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냥 웅크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전라순찰사 권율은 독성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한양 탈환을 위해 진지를 한양근처로 옮기기로 했다. 그는 조방장 조경(趙儆 1541∼1609)에서 주둔지를 찾도록 지시했는데 조경은 어둔 밤을 틈타 강을 건너가서 지형을 살피다가 군사를 주둔시킬 만한 높은 언덕을 발견하니 그곳이 곧 고양의 행주산성이었다.
조경의 보고를 받고 지형을 살펴본 권율은 이곳 보다도 더욱 서울에 가까운 마재(안현 鞍峴)에 진을 치고자 했다. 그러나 휘하의 장수들이 극력 반대했다. 마재는 서울에 너무 가까워서 진을 치면 군사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권율은 생각을 바꿔서 조경이 봐 둔 행주산성에 진을 치기로 했다.
권율은 군사를 두 패로 나눠 4천여명을 전라도 병사 선거이(宣居怡 1550∼1598)에게 줘 금천(衿川)에 머물도록 하고, 권율 자신은 승장 처영이 지휘하는 승병 1천명을 포함한 2천300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서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선거이는 1587년에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과 함께 녹둔도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과 절친한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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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양천일대에는 소모사 변이중의 1천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창의사 김천일은 강화도로부터 나와 해안에 진을 쳤으며, 충청감사 허욱은 통진에 진을 치고, 충청수사 정걸 또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파주의 도원수 김명원 군대, 양주의 경기도 방어사 고언백 군사도 한양을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주둔하면서 “명나라의 군사가 많이 왔으니 왜적이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성책(城柵)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조방장 조경은 “외로운 군사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권율에게 의견을 제시했으나 권율은 조경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그런데 2월8일에 직산현 방면에서 양주로 올라와 있던 체찰사 정철은 전황에 대한 논의 차 권율을 소환했다. 조경은 권율이 출타한 틈을 이용해 모든 군사를 동원해 이틀 만에 성책을 2중으로 쌓았다. 조방장 조경은 권율보다 더 선견지명이 있었다.
목책(木柵)은 2월9일에 완성됐고, 행주전투는 2월12일에 있었으니 만약 목책이 설치 안됐더라면 행주전투는 어찌 됐을까. 조선군이 이길 수 있었을까? 조방장 조경은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제주목사를 했으나, 1591년 강계부사로 있을 때 그곳에 유배돼 온 송강 정철을 우대했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그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방어사가 돼 황간·추풍 등지에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김산(金山)에서 왜적을 물리치다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다가 1592년 겨울에 권율의 조방장이 돼 독성산성 전투에 참가한 것이다.
권율이 체찰사 정철을 만나고 행주산성으로 돌아와 보니 2중으로 성책이 만들어져 있었다. 권율은 이를 매우 흡족해하면서 조경을 칭찬하고 본격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먼저 활과 화살을 점검하고 화차와 총통과 화약을 정비했다. 화차는 변이중이 보내온 것이었다. 일찍이 변이중은 큰 수레 안에 총구 40개를 내고 그 안에 총기를 장치해 밖으로 향해 쏘는 화차를 300대 만들었는데 이중에 40대를 권율에게 보낸 것이다. 권율 자신도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신무기를 만들었다. 기계가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면서 그 회전의 탄력을 이용해 돌을 연달아 날리는 투석차였다.
권율은 투석전에 사용할 돌을 주워 모으고, 진지후방에는 여러 개의 가마솥을 준비해 화전에 대비해 물을 가득 채웠다. 적의 화공작전에 대비해 젖은 수건도 준비했고, 재주머니 한 자루도 각자의 허리에 차도록 했다. 재주머니에는 횟가루가 들어 있었는데 적이 접근하면 얼굴에 뿌리려는 속셈이었다.
이 때 한양에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왜군 3만 명이 집결하고 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에 벽제관에서 명나라 군사를 패퇴시켜 사뭇 사기도 높았다. 왜군은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사가 강을 건너서 한양 서쪽에서 20리도 채 안 되는 곳에 진을 치고 무모하게도 한 판 싸움을 하자고 벼른다는 첩보를 듣고 크게 당황했다. 왜군 수뇌들은 논의하기를, 비록 권율 군사가 소수이긴 하지만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에서 권율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에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군사를 동원해 섬멸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해 한 번도 전투에 나서 본 적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해 이시다 미쓰나리, 마스다 나가모리, 오디니 요시쯔구의 3봉행등 본진 장군들까지 나섰다. 3만명 왜군은 7대로 나눠 홍제원을 나와 행주산성으로 진군했다.
2월12일 새벽에 왜군은 조선 군사가 외로이 홀로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으로 성책을 포위했다. 우리 군사들은 험준한 산위에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125미터의 덕양산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평야지대에 홀로 솟은 산이어서 사방의 관제가 용이했다.
또한 서남쪽은 한강에 위치하고 동쪽은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흐르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경사가 매우 급해 서북쪽 한곳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새지로서의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적은 올라보면서 공격하는 처지가 돼 아군은 산성 전투에 유리했다.
우리 척후 장교가, 적이 좌우익(左右翼)으로 나뉘어 붉은 기와 흰 기를 들고 온다고 보고했다. 권율 장군은 모든 군사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명령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진영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왜적이 가득 차 있었다.
이에 권율은 모든 군사를 모아놓고 일장 훈시했다.
“자세히 적세를 살펴본다면 고립된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갑자기 적병을 만나니 우리는 맨손으로 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러면 무엇으로 왜적을 제압할 것인가? 오직 한 가지이다. 죽음으로서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 밖에 없다. 남아는 의 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공훈과 명예를 누가 다시 논하랴. (남아감의기 공명수복론 男兒感意氣 功名誰復論)”
이어서 권율은 모든 장수에게 타일러 대오(大悟)를 엄중히 단속해 활을 버티고 기다리게 했다. 적이 가까이 올 때 까지는 화살을 최대한 아끼도록 명령했다. 이윽고 적의 선봉인 기병 백여 명이 먼저 와서 시위를 하더니 금방 수만 명의 왜군이 들을 덮고 우리 진영을 포위했다. 왜군은 군사를 세 패로 나눠 쉬어가면서 교대로 달려들었다.
고함 소리가 땅을 흔들고 총탄이 비 오듯 했다. 우리 군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권율은 친히 밥과 국 그리고 물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면서 군사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면서 전투를 독려했다. 김세곤 역사인물 기행작가
사진 1. 행주산성 전경
사진 2. 권율의 훈시(행주산성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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