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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제19회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상),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김세곤 글

제19회 의병장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상)


  충남 금산을 간다. 의병장 고경명(1533-1592)의 순절지를 찾아서. 1592년 7월 10일 의병장 고경명은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60세이었다. 금산으로 가는 차에서 고경명의 의병활동 자료를 읽는다.

 

   1592년 5월29일 담양 추성관. 지금의 담양 동초등학교 자리. 이곳에서 고경명은 박광옥, 유팽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였다. 이 모임에는 남원의 안영과 양대박, 순창의 양사형 등 21개 읍 61명의 사림과 유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6월11일 드디어 고경명의 의병은 담양 추성관에서 출발한다. 맹주는 고경명, 좌부장은 유팽로, 우부장은 양대박, 종사관은 안영이었다. 담양 회맹군이 태인 ․ 금구를 거쳐 전주에 이르렀을 때 임진강을 지키고 있던 군사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와 일시 동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양대박은 다시 군사를 모으고자 남원으로 향하였고, 본진은 전주에 머물면서 훈련소를 설치하고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6월22일에 전주의 고경명 부대는 여산으로 진영을 옮기었고 6월27일에는 충청도 은진까지 진군하였다. 그런데 황간에 있던 왜적이 금산을 넘어들어 전주로 쳐들어 갈 것이란 소문이 들려왔다. 고경명도 전주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7월1일에 연산으로 진을 옮기었다. 이때 고경명은 유팽로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적을 토벌하자고 약속하였다. 전라도 의병이 진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금산을 침범하여 군수 권종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7월8일 고경명 의병은 서둘러 금산성으로 진격한다. 그리고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싸울 태세를 갖춘다.


 

    승용차는 어느덧 충남 금산에 도착한다. 의병장 고경명의 순절지 주소는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522-14,15이다. 금성면의 어느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면서 고경명 순절비의 위치를 물었다. 그랬더니 조금 더 가면 길옆에 있는 비가 순절비란다.  주유소 직원의 말대로 길을 따라서 조금 더 갔더니 길 위쪽에  두개의 비각이 있다. 안내판도 보인다. 


 차에서 내려 안내판을 살핀다. 고경명 선생 비. 금산군 문화재 자료 제28호이다. 안내판 전문을 자세히 읽는다.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 선생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사실을 새긴 비이다. 선생은 1558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이 몰락할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모집한 의병 6천명을 이끌고 1592년 7월10일에 금산에 침입한 일본군과 싸우다 눈벌(와평)에서 전사하였다.


  효종 때 금산군수 여필관이 비문을 지어 선생이 전사한 곳의 건너편 산기슭에 순절비를 세웠으나,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비가 파괴되었다. 비석의 파편을 한식 비각 안에 정리하였고, 2002년에 피비를 복원하였다.

1952년 후손들은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그 비를 1962년에 세워진 석조 비각 안에 보존하였다.

    

   조금 위로 올라가니 비각이 두개 있다. 바로 위에는 일본 경찰이 파괴한 비문을 보존한 비각이 있고, 조금 떨어져서 호남 유생들이 다시 세웠다는 비각이 있다. 일본 경찰이 파괴한 비문은 파편 조각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군데군데 글씨가 몇 자 남아 있다.


   호남 유생들이 만들었다는 비각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바깥에 비각이 있고 석조문을 들어가니 비가  있다. 석조 비각 문에는 위에 의진구허 義陣舊墟, 양편에 충관일월 忠貫日月 의진우주 義振宇宙 라고 글씨가 적혀 있다. 충의에 빛나는 제봉 고경명을 기리는 글 같다. 비각 안에 있는 비는 거북등 위에 비석이 있고 맨 위에는 용두가 새겨져 있다. 비의 정식 명칭은 제봉고선생순절지기 殉節地記이다. 고경명 선생이 순절한 자리임을 기록한 비라는 의미이다. 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비의  뒷면에는 효종 임금 때 금산군수를 한 여필관이 지었다는 비문이 쓰여 있다. ‘군지북오리유와평즉제봉고선생순절지지 郡之北五里有臥坪卽霽峯高先生殉節之地’로 시작하는 비문이다. 비문의 맨 마지막에는 숭정기원후 임진구월 금산군수 여필관 지 呂必寬 識 라고 적혀 있다. 그 옆면에는 선생순절 6주갑 되는 임진년 춘3월에 호남사림들이 세웠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6회갑 즉 360년이 되는 해를 계산하여 보니 1952년이다. 1952년이면 6.25 전쟁 중인데 호남사림들이 이 비를 세웠다니 정말 감탄스럽다.


   의병장 고경명 순절지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가면 있다. 그리고 보니 이 비에서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곳이 와평 臥坪 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눈벌이다. 눈벌이란 ‘누워 있는 벌판’이란 뜻인데 지형지물이 전혀 없는 허허 벌판이다. 이곳에서 고경명이 이끈 8백 명의 호남의병과 곽영이 이끈 수백 관군의 조선 연합군이 고바야카와가 지휘하는 수천의 왜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었다.  물론 전투의 결과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군사훈련도 별로 못한 의병이 정예 왜군과 정면 승부를 하였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날, 고경명이 치른 금산전투 장면은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 <연려실 기술> <난중잡록> <제조번방지> <국조보감>등 여러 책에 남아 있다.

   

    여기에서 <선조수정실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보자. 정사와 야사의 기록을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먼저 선조수정실록이다.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17번 째 기사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의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경명이 모집한 병사 6천∼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동틀 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의 선봉장인 영암 군수(靈巖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고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중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 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 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면유(面諭)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하였다.


   경명의 자(字)는 이순(而順), 호(號)는 제봉(霽峯)이다. 풍류와 문채는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였으며 중년에는 벼슬길이 막혔으나 조용한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리에 임해서 절개를 드러냈으므로 조정에서는 그를 일찍 기용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의 시(詩)는 대가(大家)로 불리워졌으며 유고(遺稿)가 세상에 전한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2010.11.17 무등일보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