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암/서/원/과 변/이/중 //
장성역에서 그리 멀지않은 장안리에는 봉암서원(鳳巖書院, Bong am Letcure Hall)이 있다. 이 서원 일대는 기념물 54호로 지정되어 보호된다.
서원 주변에는 상오 한지(韓紙) 마을과 월성 곶감마을, 국가의 길흉이 있을 때마다 물빛이 변한다는 방울샘이 있다. 이 방울샘은 물방울이 방울방울 솟아오른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방울샘은 그 영묘한 만큼이나 아주 오랫동안 영천(靈泉)으로 즐겨 불려왔고, 그래선지 마을 이름도 아예 영천리가 된 듯 하다. 이 샘은 국가의 길흉을 예견하는 효능을 가졌다는데, 병란(兵亂)이 있을 것 같으면 붉은 물빛으로 변한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실제 동학농민전쟁과 한국전쟁 때 그 물빛이 붉은색으로 변했다는 말을 입으로 입으로 전하여 믿는다. 이 물은 전염병이면 흑색으로, 풍년이면 흰색으로 변한다는데 그 샘에는 아주 자그마한 물고기가 헤엄치며 떼지어산다. 예로부터 물방울이 방울처럼 올라오는 것은 용왕이 숨쉬기 때문이고, 물고기는 용왕의 사자(使者)라고 하여 절대 잡지 않는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야 어쨌든 그 맑은 샘물빛이 늘 하얗게 되어 매년 풍년이 되라고 기원한다.
이 방울샘에서 개울을 건너게 되면 영천 2리 언덕배기에 고경명(高敬命)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를 만나게 된다. 다시 황룡강 물줄기를 건너면 봉암서원에 닿게된다. 우리에게 임진왜란 때 화차(火車)를 만들어 행주대첩(行州大捷)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배운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 1546~1611). 바로 장안마을 봉암서원은 변이중을 모신 서원이다. 행주산성에서도 그의 화차를 전시하고 있는데, 이 곳에 화차전시관인 시징당이 있다.
시징당에는 화차 모형과 총통 등 유물 18종을 전시하고 있으며, 최근에 북이면 조양리 덕곡마을과 서삼면 송현리 공평마을에서 화차 제작터가 발굴되어 관심을 모은다.
본레 봉암서원은 1697년(숙종 23)에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이 곳 고향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毁撤令)을 모면하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가 1974년 이후 몇 년간 복원사업을 거쳐 1984년에 새로이 단장하여 우리 앞에 서있다. 봉암서원은 변이중을 주향(主享)으로 변경윤 변휴 변윤중 변덕윤을 종향(從享)으로 모신다. 서원은 외삼문(外三門)인 두남문(斗南門/사진), 강당 및 동, 서재의 강학공간, 내삼문과 사당의 제향(祭享) 공간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이 서원도 앞에 교육공간, 뒤에 사당이 배체되는 일반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를 이룬다.
변이중의 선비다운 삶 변이중은 보통 우리에게 화차의 발명가쯤으로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으나 실상 성리학(性理學) 교육을 진작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기 위해 진력한 선비였다. 그는 장성 장안리 출신으로 본관은 황주이며, 호는 망암이다. 이 망암이란 호는 황룡강이 범람하면 그의 아버지 산소가 있는 북일면 성산에 가지못한 채 서삼면 송현 뒷산에서 묘지를 바라보며 울었기에 생겼다고 전한다. 그는 1568년(선조 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드디어 1573년(선조 6)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로 등제한다.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생으로 처음 교서관(校書館) 저작(著作)으로 입사(入仕)한 후 외직인 평안도 어천의 찰방(察訪)을 지냈다. 40살에 이르러 평안도 도사(都事)에 올랐으나 1585년(선조 18) 파직 당한 채 귀향하게 된다.
고향에서 교육에 힘쓴 변이중 변이중은 고향에 돌아오자 성리학을 체득한 사림(士林) 선비로서 향약(鄕約) 보급과 실천에 앞장섰다. 그는 결국 1586년에 장성 출신이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문인이었던 하곡(霞谷) 정운룡(鄭雲龍)과 함께 장성 향헌(鄕憲) 20조를 만들어 성리학에 입각한 향촌의 풍속교화를 위해 진력하였다. 이 규약은 임진왜란을 만나 일시 중지되기도 했으나 이를 보완한 향약이 1604년부터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장성에서의 활약도 크지만 그의 진가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더욱 발휘되었다. 그는 우의정 윤두수(尹斗壽, 1533~1601)의 천거로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를 맡았다. 이 때 그는 조도사(調度使) 독운사(督運使) 등을 번갈아 맡으면서 모병과 군량 모곡 등 군비 수습에 전력했으며, 양천에서는 왜군과 싸워 전공도 세운다. 그리고 화차를 제작하여 권율(權慄)이 행주대첩을 거두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 후 그는 1603년(선조 36)에 함안군수 등을 역임했으나 결국 1605년 사임한 끝에 다시 귀향하여 졸(卒)하였다.
변이중은 성리학에 밝으면서도 국난을 당해 온갖 신무기를 개발한 한국의 과학자였다. 그는 소모사로 있는 동안 종제(從弟) 변윤중(邊胤中)의 도움을 받으면서 화차를 만들었다. 이 화차는 왜군의 조총(鳥銃)을 막을 수 있도록 수레 사면에 철갑(鐵甲)을 씌었으며, 40개의 구멍마다 승자통을 장치하여 그 안에서 적진을 유린하면서 사방으로 40발의 불화살이나 총탄을 발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는 이같은 화차를 40량이나 제작하여 권율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가 그의 논문인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입각하여 화차를 제작한 것은 한국인의 과학전통과 그 저력에서 비롯된 산물이자 한국과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이었다.
왜군을 유린한 변이중의 화차 그 때 저 행주산성, 거기엔 서울 수복의 간절한 염원과 의지가 넘쳐 흘렀다. 비록 몇 천에 불과하지만 그 의기(義氣)야말로 수만의 왜군으로도 압도할 수 없었다. 아낙네들은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부서진 성(城)을 다시 쌓았고, 변이중이 만든 총포와 화차가 저들 왜군을 유린하면서 승리를 거두었던 행주대첩.
그건 서울탈환은 물론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선비들의 의병정신과 민족에너지의 결집에서 승리했던,
그건 처음 왜군의 조총에 당황했으나 이내 우수한 무기를 만들어 저들을 송두리째 격퇴했던 한국과학의 저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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