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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

심의겸 - 고봉 기대승과 인연

 
심의겸  : 나주 월정서원에 배향됨
 
1535(중종 30)~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심의겸의 글씨 /심의겸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이며,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이다.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인순왕후(仁順王后 : 명종의 妃)의 동생이다.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당시 윤원형(尹元衡) 등의 소윤(小尹)이 문정대비(文定大妃)를 배경으로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은 1563년 이량(李樑)을 이조판서로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량이 횡렴을 일삼고 사림을 탄압하여 사림으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척신(戚臣)이기는 했으나 척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사림을 옹호했던 그는 국왕의 밀지(密旨)를 받고 대제학 기대항(奇大恒)으로 하여금 상소케 하여 외숙부인 이량 일파를 탄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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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이량 사건때  화를 입은 사림들이 기대승 윤근수 등이다.  이때 기대승은 소기묘로 칭하여졌다. 
기대승은 심의겸의 도음을 받은 것이다.   기대항은 기묘사림 기준의 아들이고, 기대승의 사촌 형이다.
 
 
 
1564년 지평·검상, 1565년 사간·부응교, 1566년 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어 1569년(선조 2)에 좌부승지·대사간, 1572년에 이조참의를 지내면서 전배(前輩) 사류와 교유가 많았다.
명종대 소윤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전배들은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등장한 김효원(金孝元) 등의 후배(後輩)들은 급진적으로 척신정치의 유제를 척결하고자 했으므로 전배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이조정랑 오건(吳健)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신진사류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던 김효원을 천거하자, 심의겸은 그가 일찍이 윤원형의 집에 기거하면서 아부했다고 하여 임명을 반대했다. 결국 1574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1575년에 심의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이번에는 거꾸로 김효원이 반대했다. 이같은 대립은 전·후배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되었으며, 결국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사림은 2개의 당파로 나누어졌다.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던 까닭에 심의겸파를 서인으로 불렀으며, 김효원의 집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김효원파를 동인이라고 불렀다. 그해에 동서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한 이이(李珥)의 상소로 김효원과 더불어 외직으로 밀려나, 개성유수·전라감사를 지냈다. 그뒤 사직하고 파산(破山)에 내려가 있다가 1580년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판과 함경감사 등을 지냈다.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았을 때 이이의 변호로 무사했으나, 이이가 죽은 뒤 1584년 동인의 득세로 파직당했다. 청양군(靑陽君)에 봉해졌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