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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

제3화 삼촌 기준의 죽음

 원래  행주 기씨 가문은 경기도 고양군이 고향인데  기대승의 작은 아버지 기준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죽자  이에 상심하여 그의 아버지 기진 奇進이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먼저 복재 服齋 기준 奇遵(1492-1521)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기준 奇遵은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서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한 사림이다.  그는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다.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예습관(天文隸習官)을 겸했고, 검토관(檢討官)·수찬(修撰)·검상(檢祥)·장령·시강관 등을 두루 역임했다.   또한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안인 균전법을 건의하여 훈구파로부터 질시를 받기도 하였다.   

1519년(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도 조광조· 김식· 김정 등과 함께 하옥되고, 충남 아산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옮겨졌으며. 그 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자 죽임을 당했다.


기준의 죽임에 대하여는 두 가지 일화가 전하여진다. 하나는 기준의 꿈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절명시이다.

  

먼저 <해동잡록>에는 기준의 죽음과 관련한 꿈 이야기가 전해진다.


  “ 그가 하루는 궁권에서 당직(當直)을 하다가 꿈에 국경 밖을 여행하였는데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고난이 너무 심하여 길가에서 시 한수를 읊조렸다고 한다.


이역(異域)의 강산도 고국과 같은데 / 異域江山故國同

하늘 끝에서 눈물지으며 외로운 배에 기댔구나. / 天涯垂淚倚孤篷

검은 구름은 끝없는데 강의 관문은(河關)은 닫혔고 / 頑雲漠漠河關閉

고목은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텅 비었네 / 古木蕭蕭城郭空

들 길은 가늘게 가을 풀숲에 갈라졌고 / 野路細分秋草外

인가는 아스라이 석양 속에 담겨 있네. / 人家遙住夕陽中

만 리 길 가는 배 돌아올 삿대도 없는데 / 征帆萬里無回棹

푸른 바다 아득하여 소식조차 그쳤어라 / 碧海茫茫信不通


하고 읊조린 후에 그는  갑자기 꿈을 깨어 당직실 벽에 그 시를 적었다.


 그 후 그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를 가는 데 도중에서 보는 것이 모두 시 중의 광경이라. 그는 말을 멈추고 시를 읊으며 처절히 흐느끼니 따르던 종자(從者)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었다.


 귀양된 곳에 이르러 얼마 있다가 사약을 받고 죽으니, 인사(人事)란 모두 먼저 정해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비들이 이 시를 서로 전하면서 애석해하지 않는 이 없었다. “



 

다음은  허균의  <학산초담>에 실려 있는 그의 절명시 이다.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구나.

천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


日落天如黑     일락천여흑

山深谷似雲     산심곡사운

君臣千載意     군신천재의

惆悵一孤墳     추창일고분




29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한 젊은 개혁주의자의  절명시. 허균의 말처럼 이 시를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장과 간장이 다 찢어질 정도로 비장함과 참담함이 느껴진다.

 

 

 

고봉 아버지 기진의 문중 .

 

 

 

고봉  아버지  기진이 살던 곳. 덕성군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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