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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동북공정

고구려 역사기행 -광개토태왕비

 

 

 

고구려 역사기행(4) 

 

 고구려의 위대한 제왕 여기에 잠들다. -광개토태왕비와               태왕릉          


              김세곤 (노동부 부이사관, 통일교육원 교육중)

               


  광개토태왕비와 태왕릉은 장군총에서 집안 국내성쪽으로  1km 정도를 가면  있다. 입구에는 버스 주차장이 넓게 마련되어 있고  매표소 앞은 철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입구에는  ‘고구려문화축제’라고 써진 포스터가 붙어 있다.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에서 고구려 문화 열기가 이렇게 대단하다니 참  흥미롭다.  조금 가니 호태왕비,  태왕릉 가는 길을 표시한 표시석이 있다. 나는 광개토태왕비를 먼저 보기로 하고 관광안내원 정선생을 따라 갔다.


이윽고  내 앞에 웅장한 비가 하나 보인다. 내 키의 3-4배는 됨직한 비이다.  비 주변은  3면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고, 비는 4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비각 안에  있다. 자세히 보니 비각  바로 위에 호태왕비 好太王碑라고 쓰여 있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 제 19대 고구려왕인 그는 재위기간 22년 동안에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고 북쪽은 부여, 서쪽은 비려를 토벌하였으며 신라를 도와 왜구를 여러 번 패퇴시켜  북부 지역은 만주 흑룡강성 위까지 서부는 요동반도를  남부는 한강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한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제왕이다.


   그의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광개토대왕, 평안 호태왕, 호태왕, 또는 영락태왕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비에는 그의 정식 시호가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國岡上 廣開土境 平安好太王”으로 되어 있다. 이래서 중국 사람들이 이 비를 약칭으로 호태왕비라고  부르나 보다. 여기에서 호태왕의 정식 시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강상 國岡上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지역 이름이고, 광개토경 廣開土境은 국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이며, 평안 호태왕 平安好太王은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태왕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보니 환인에서 여기로 오면서 관광버스에서 보니 평안이라는 상호가 여러 개 있었다. 또한 북한에 평안도란  道 이름이 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명칭은 태왕 太王 이다. 태왕은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로서 여러 제후들을 다스리는 황제나 천제를 말한다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황제나 로마의 황제와 동급 명칭이 태왕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이 광개토대왕을 황제와 동격인 태왕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광개토태왕이 위대한 역사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와 반면에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오히려 광개토왕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나는 이 비를 바라보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내 나이 55세에 처음으로 이 위대한 고구려의 역사 현장을 보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회가 깊다. 나는 이 역사적 기념물을 기리기 위하여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사진은 비교적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다. 중국 공안(경찰)이나 개들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외부에서의 사진 촬영은 자유로웠다. 


이어서 나는  관광안내원 정선생과 함께  호태왕비각 안으로 들어갔다.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제왕인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광개토태왕 붕어 후 2년 뒤인 414년에 장수왕(재위 413-491)이  국내성에서 동북으로 4km 정도 떨어진 산비탈 아래에 세운 비이다.  이 비는 뒤로는 크고 높다란 우산 禹山을 등지고  앞에는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을 굽어보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가 망한 후에 1천년 이상 세인의 무관심속에 묻혀 있다가 1875년경에 밭갈이 하는 농부에 의하여 발견되었다한다. 이 마을 아이들은 이 비 위에서 놀았다 하며  마을 사람들은 탁본을 하여 돈벌이도 하였다 한다. 


광개토태왕. 그는 18세에 왕이 되어 39세에 별세할 때까지 22년간 고구려를 통치한 태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18대 고국양왕이고 큰 아버지가 17대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자 그의 동생 고국양왕이 왕위를 물려받았고 고국양왕이 늦둥이로 난 아들이  바로 그이다. 광개토태왕은 어렸을 때 이름은 담덕 談德이었다. 이는 ‘덕을 이야기 한다’라는 뜻인데 이 이름을 보면 ‘덕성을 갖춘 왕이 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광개토태왕은 어릴 때부터 두려움을 모르는 용사의 기질이 있었다 한다.

그가 4세 때 일이다, 호랑이 한 마리가 난데없이 궁중에 들어왔다 한다. 궁중은 호랑이를 피해 도망가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이를 모르는 어린아이 담덕은 궁중 마당에서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호랑이는 마당까지 와서  그를 노려보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한다.

 

   한편 그는 12살에 태자가 되어 그때부터 제왕 수업을 한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영특하고 매우 용감하였다 한다. 태자 시절에 그는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활에 맞아 전사한 빚을 갚기 위하여 백제를 침공하여 석현등 10개성을 회복하고 근수구왕이  한강 남쪽의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까지 하였다. ( 이 사항은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에 나와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즉위 원년에 백제를 정벌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윽고 나는  누각 안으로 들어가서 비를 자세히 본다. 안내원 정선생은 이  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준다. 광개토태왕비는 자연석 하나의 통돌로 되어 있는데 위로 올라가면서 폭이 좁아지는 사다리꼴 형태란다. 이 비의  높이는 6.29 미터이고 아랫변은 1.3 미터이며, 무게만 하여도 37톤이나 된다고 한다. 4면에 예서체 글씨가 총 44행 1,775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3부로 되어 있다.

1부는 서언으로서 고구려 건국의 내역 즉 시조인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역사와 그 후 유리왕과 대무신왕이야기 그리고 광개토태왕의 생애및  비의 건립 경위등이 있다. 2부는 이 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 태왕이 즉위한 이후의 대외정복 사업 즉 비려, 왜, 백제, 숙신. 후여, 동부여 정벌의 내역이 연대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3부는 수묘인연호 守墓人烟戶라 하여 묘의 관리에 관한 사항 즉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 명단및 방침,  관리 규정 등이 적혀 있다.

  


여기에서 이 비의 서언인 추모왕과 비의 건립경위를 조금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옛날 우리들의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세울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모친은 하백의 딸로서  낳아 마자 하나의 큰 알 이었는데 알을 깨고 그는 나왔다. 태어나자 곧 성덕이 있었다. (중략) 그는 불류하곡 홀본 지방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아 국도로 삼고 고구려 국가를 세웠다. 그 후 그는 인간 세상의 왕위가  싫었다. 이 때문에 상제가 황룡을 보내어 그를 맞았다. 추모왕은 문득 홀본 동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유명을 받은 태자 유류왕 (유리왕)이  치국지도로 사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발전하였다. 대주류왕(대문신왕)은 양대의 기업을 계승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대주류왕으로부터 다시 17세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그는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그의 은택은 마치 황천 皇天과 같고 그의 무궁은 사해에 진위하였다. 그는 외래의 침우를 제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그 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가는 부강하고 백성도 많아지고 오곡도 풍성하였다.  하늘은 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은가 ?  이렇게 훌륭한 국왕이 39세에 국가와 세상을 버리고 돌아가셨도다. 갑인년 9월29일 을유의 그날 그를 안장하였다. 이제 그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능 앞에 이 비석을 세워 그의 생전 업적을 명기하여 후세에 보이노라.



  이 비는 단순히 광개토태왕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고구려의 뿌리를 밝힌 사적이며 고구려가 하늘의 뜻에 의해 선택된 천손임을 동아시아 종족들에게 알리는 메시지이다. 또한  이 비는 고려 때 김부식이 지은 신라 중심의 <삼국사기>보다 700년 앞선 5세기에 고구려인이 직접 작성한 기록으로서 고구려사를 재해석 할 수 있는 최초의 고구려 기록이다. 이 비를 통하여  고구려가 5세기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여는 중심국가로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며 고구려인의 정신과 기상을 엿볼 수 있다.

 



광개토태왕릉에서 


호태왕비를 보고 나서 나는 발길을 태왕릉으로 옮긴다. 태왕릉은  비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올라가면 있다.  태왕릉 가는 길에 ‘태왕비와 태왕릉 사진 전시관’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런지 문이 잠겨 있다. 광개토태왕릉은 직경 60 미터,  높이 15미터의  거대한 자갈 능이다. 원래는 이 능도 피라미드 형이었는데 내부가 도굴 당하고 파헤쳐 지는 바람에 능의 제 모습이 남아 있지 않고 자갈 산처럼 된 것이다. 태왕릉은 처음에는 누구의 능인지도 알 수 없었는데 무덤 벽돌 무더기에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태왕릉이 산처럼 평안하며 산 뿌리처럼 견고하기를 바라옵니다.) ‘ 라고 써진 벽돌이 발견되어 광개토태왕릉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로서 광개토태왕비도 능묘에 속한 신도비임이 확인 된 것이다. 


나는 계단을 따라서 태왕릉으로 오른다. 능은  돌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로 많이 훼손되어 있다. 그리고 능 안의 석실도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보니 장군총과 북한의 만포시가 보인다. 사방을 둘러보니 산세가 너무나 좋다. 이곳이 세상의 중심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능 정상에서 내려올 때는  반대편으로 내려왔다. 반대편으로 오면서 제단 祭壇과 큰 돌을 보았다. 제단에는 altar라는 영문 글씨도 있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다. 제단이 있는 곳이  바로 정면인데 이곳에서 능을 다시 보니 상당히 위엄이 있다. 아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장군총에서 보았던 큰 돌도 여러 개 있다. 이 호석은 원래 한 면에 5개씩 있었다 하는 데 지금은  몇 개 밖에  안 남아 있다.




이제 고구려 역사 기행을 마무리한다.  백두산 구경을 하기 위하여 통화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광개토태왕에 대하여 생각한다. 광개토태왕. 그는 누구인가? 그는 고구려를 가장 강건하게 만든 위대한 제왕이다. 남쪽의 백제, 신라, 왜인들과 북쪽의 거란, 선비, 말갈족을 다스리고 중화권의 한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정복자이다. 그는 유목민의 이동성과 농경민의 정착성, 해양인의 회귀성을 모두 융합시키어서 고구려를 해양과 대륙을 이은 국가로 만든 제왕이요,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웅비의 한국을 만드는 데 모델로 삼아야 할 새로운 인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