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이었다.
중국은 상하이를 국제금융 중심지로 육성하겠다고 선언한다.
세계 어느 나라도 주목하지 않았다.
배포 큰 중국이 또 한 차례 허풍을 떠는구나 여겼다.
이때 상하이 시정부는 세계은행 문을 은밀히 노크한다.
상하이를 국제금융센터로 만들기 위한 `액션플랜`을 짜달라는 컨설팅 용역을 의뢰했다.
세계은행에서 국제금융팀장을 맡고 있었던 전광우 국제금융대사가 프로젝트 총괄을 맡았다.
컨설팅팀은 몇 개월 연구 끝에 아주 긴 목록의 액션플랜을 마련했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매긴다.
세계은행은 그 목록의 첫 번째로 다소 엉뚱한 것을 올렸다.
`영어`였다.
금융규제 완화도 아니고, 외국 기업의 증권거래소 상장도 아니었다.
상하이 비즈니스맨들, 특히 금융종사자 영어실력을 원어민 수준으로 끌어올리라는 게 우선순위 1번이었다.
세계은행 눈에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고, 그 소프트웨어의 핵심은 영어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하이는 그 후 조용하게 세계은행 권고를 따랐다.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정신으로.
현재 상하이 푸둥에는 350여 개 국내외 금융기관, 4000여 개 로펌, 회계자문사들이 밀집해 있다.
이들 기업을 끌어들인 힘은 벙벙한 금융허브 청사진이 아니라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푸둥 비즈니스맨들이었다.
한국 정부가 서울 혹은 송도를 금융허브로 만들겠다고 야심찬 계획을 발표할 때 상하이는 아마도 코웃음을 쳤을지 모른다.
속으로 "너희가 국제금융의 핵심을 알기는 아는 거야"라고.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비단 금융뿐만 아니라 고급서비스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은 언어"라고 실토했다.
그렇다.
문제의 본질은 영어다.
영어에 관한 한 한국은 참 독특한 나라다.
거의 무한정 자원을 쏟아붓지만 결과는 신통찮다.
연간 영어 사교육비가 15조원. 교육 예산 중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다.
(매일경제 4월 13일자 1면 참조) 토플시험은 광풍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난리법석이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미국인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그렇게 한국에서 수년간 영어공부를 했는데 말은 왜 그리 못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게 첫 번째이고, 그렇게 영어를 못해도 성적은 어떻게 잘 받는지 그게 두 번째 미스터리라는 것이다.
프랑스 석학 자크 아탈리도 최근 저서 `미래의 물결`에서 "한국 사람들은 영어과외에 엄청난 돈을 지출하는 데도 전 세계 토플 순위는 110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국 영어의 낙후성을 지적했다.
영어교육에 관한 한 많은 편견과 오해가 있다.
그것은 마치 일본 독설가 오마에 겐이치가 말한 대로 한국 국민들의 재벌에 대한 이중잣대와 비슷하다.
자기 자식은 재벌회사에 취직시키려고 하면서 재벌에 대한 반감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식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하길 원하면서 정말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하자고 하면 공교육을 지키자는 둥 공세를 취한다.
그들은 "전국민이 영어에 매달릴 필요가 뭐 있어. 번역이나 통역을 활용하면 되지" 하면서도 영어실력 차이로 소득격차가 발생하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가 엄존하는 현실을 알고 있다.
영어는 생존의 도구이며 일종의 권력임을 그들은 안다.
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친미주의자고 우리말을 지키자는 사람은 민족주의자로 분류되는 이분법적 집단의식은 지난 2000년에 제기됐던 영어공용화 주장을 일거에 함몰시켰다.
지금의 부모 세대는 좋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영어 부담을 덜지 못해 평생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행여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낙오한다면 그건 너무나도 불공평하다.
그 아이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쯤이면 같은 또래 중국인들에 비해 몸값이 떨어지는 것을 깨달을지 모른다.
지금 상하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우리보다 3배나 강도 높은 영어교육을 시킨다.
그렇다면 원망은 지금의 부모세대에 돌아간다.
"반미 좀 하면 어때"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영어 때문에 국민이 기죽지 않도록 다함께 노력하자"며 "나도 시간 있으면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신선한 충격이다.
영어는 이념 문제가 아니라 실리 문제다.
하나의 외국어가 아니라 일종의 상용어로 접근해야 옳다.
영어마을을 설립하고 학교에 원어민 교사 몇 명을 늘리는 것은 보조장치일 뿐 근본적 해법은 아니다.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영어교육에 극적 반전이 필요하다.
[손현덕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