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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좋은 글

학자와 저서 -박석무

 

 

 

학자와 저서-1


법관은 판결로 말하고, 배우는 연기로 말하며, 학자는 저서로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매우 원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이 별로 시끄러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나타내고 진실하지 못한 전문성을 발휘하다가 문제가 야기되어 세상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판결로만 말하도록 그냥 두지 않고, 연기나 저서만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이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없도록 강요하는 세태 때문에 그러하지 못하는 현실은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살펴보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함 때문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세상의 강요 때문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전문가들이 많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지식인이나 작가들의 표절 문제도 그렇고, 학자들이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정신을 쏟느라 본격적인 저서가 제대로 나오지 못함도 문제의 하나입니다.

18년의 귀양살이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오롯하게 학자의 자세를 지키며 본격적인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여, 이른바 ‘실학의 집대성자’라는 호칭을 받는 다산은 정말로 저서로 말했던 학자였습니다. 『주역사전(周易四箋)』이라는 24권의 방대한 저서를 마쳐놓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은 바로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어낸 책이다.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 통할 수 있고 인간의 지혜나 생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是吾得天助之文字 萬萬非人力可通 智慮所到 : 示二子家誡)라는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하면서, 이 책에 마음을 기울여 오묘한 뜻을 다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은 천년에 한번쯤 있을까 말까 한다고 걱정하면서 아끼고 중요하게 여기기를 여타의 책보다 곱절을 더 생각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정력을 기울이고 지혜를 짜내서 저작한 책이길래 하늘의 도움으로 지어낸 책이라 하고,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는 저작할 수 없는 책이라고 했을까요. 학자란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그 결과에 그만한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저서로 말한다’라는 의미를 충족한다고 생각됩니다. 저서라는 염불보다 여타의 잿밥에 정신 팔고 있는 학자들, 한번쯤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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