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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20세기古典(48)]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사는 법정의 진실게임과 비슷한 데가 있다. 예컨대 간도나 독도가 누구 땅인지 가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관계부터 확인해야 한다. 과거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보이고, 소유권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마련하여 상대에게 들이밀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러 증거를 통해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가 모두 만족할 만한 ‘객관적인 사실’을 밝혔다면 다툼은 이내 잠잠해질 터다. 그런데 역사를 철저하게 연구한다고 과연 ‘객관적인 역사’를 밝혀낼 수 있을까?

▲ E.H.카
E.H.카(Edward Hallett Carr, 1892~ 1982)는 이런 물음에 대해서 고개를 젓는다. 그는 연구실에 파묻혀 평생을 보낸 학자가 아니었다. 카는 영국 외무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으며, 잡지의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실무에 잔뼈 굵은 사람답게 그는 역사도 현실적으로 바라본다. 카는 역사란 결코 지나간 일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을 통해 과거 사실을 편집하고 의미를 다시 꾸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1961)’는 카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는 저작이다.

물론 카도 역사가답게 사료(史料)의 정확성을 강조하기는 한다. 하지만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다”. 정확하게 사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역사가를 칭찬한다면, 이는 “좋은 목재와 잘 섞인 콘크리트를 썼다고 건축가를 추켜세우는 것과 같다”. 건축가의 진짜 능력은 집을 짓는 데서 드러난다. 사학자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살려낼 때 역사가의 능력은 빛을 발한다.

카는 모든 사료는 ‘오염’되어 있음을 경고한다. 예컨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사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정확하지 않다. 그 시대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전해오는 문헌이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탓이 크다. 남아 있는 사료는 대개 아테네의 엘리트들이 적은 기록이다. 우리가 스파르타나 페르시아인, 코린토스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모두 아테네 지도층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전해줄 뿐이다. 서양 중세(中世)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중세는 흔히 종교적이며 경건했던 시대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시대의 기록은 대부분 수도원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역사가에게는 ‘상상적 이해(imaginative understanding)’가 중요하다. 사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뒷면을 생각하며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역사기록은 역사가의 편견과 당시의 관심사를 담고 있다. 역사를 해석할 때도 그렇다. 역사가는 자신과 자기 시대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종교 때문에 다투는 일은 미련하다고 여겼던 19세기 자유주의자가, 17세기에 신앙을 놓고 싸웠던 30년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 사실에 있는 그대로의 의미란 없다. 항상 바라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결국 역사가가 그때그때 관심 있는 사실을 추려내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카는 이번에도 고개를 흔든다.

그는 역사란 ‘객관적’이라고 잘라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인가? 카는 진실(truth)이라는 말에는 사실과 진리라는 뜻이 함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역사는 사실을 다룬다. 그런데 역사가가 다루는 사실은 잡동사니 사건이 아니다. 한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중요하다고 선택된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이다.

카는 자료 읽기는 쓰기를 진행해 가면서 깊어진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역사를 쓰면 쓸수록 자신의 역사관이 분명해지며, 이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더 수집하고 읽어야 할지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처럼 역사란 현재의 눈으로 과거 사실의 의미를 찾고, 반대로 과거 사실은 지금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영향을 줌으로써,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이해를 깊이 진전시키는 데 있다.” 이처럼 역사는 한 시대 사람의 합의 아래서 객관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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