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주와 함께하는 부안기행] 3.매창공원->서림공원 | ||||||||
| 매창의 향내 아직도 흩날리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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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미 기자 | ||||||||
계절은 어느새 배꽃이 흩날리는 시절을 지나 아기 주먹만한 배가 알알이 영글어가는 7월이다. 부안읍 서외리에 위치한 ‘매창공원’은 조선시대 기녀이자 시인이었던 이매창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1년 부안군에서 조성한 곳이다. 공원에는 매창이 남긴 시와 그를 기리는 시비를 여럿 만날 수 있다. 이 중에서 매창의 대표적인 시 ‘이화우 흩날릴 제’와 허균의 시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가 눈길을 끈다. 매창이 죽어 묻혔다 하여 ‘매창뜸’, 혹은 ‘매창이뜸’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현재도 매창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매창묘는 1938년에 비로서 지방기념물 6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곳에는 매창의 묘소 뿐아니라 또 한 여인의 넋이 잠들어 있다. 일제시대를 살아간 소리꾼 이중선의 무덤이 바로 매창의 묘 왼쪽에 있다. 기생 신분의 두 여인. 신분의 굴레에 묶여 살아야 했던 두 여인은 동시대 사람은 아니었지만 죽어서 같은 자리에 묻혀 벗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일행은 김형주 선생의 안내로 이매창의 묘비 앞에 서서 그녀가 살았던 때로 타임머신을 탔다. 김형주 선생의 입담은 한올 한올 비단을 짜듯 이어졌고 일순간 매창의 치마폭이 되어 일행을 감쌌다. 매창은 선한 눈웃음으로 일행을 맞는 듯했다.
매창은 조선조 중엽 선조 때 부안의 명기로, 가무와 탄금, 시문에 이르기까지 기예가 출중했다. 그녀는 1573년 부안 관아 아전의 딸로 태어났다. 계유년에 태어났다 해서 이름을 계생(癸生)이라 하기도 하고, 애칭으로 계랑(癸?)이라 부르기도 했다. 구실아치였던 아버지 이탕종은 자리를 내놓고 떠돌이 훈장노릇을 했다는 설도 있다. 매창의 아버지는 어미가 없는 어린 매창을 맡길 데가 없자 남장을 시켜 서당을 전전하며 글을 가르쳐 매창이 시문을 잘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녀의 아버지가 훈장을 지냈다는 설은 다소 신빙성이 떨어진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중인 신분인 아전이 훈장을 지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매창에 대한 기록은 그녀가 죽은 뒤 고을의 아전들에 의해 발간된 문집 ‘매창집’에 유일하게 나와 있다. 문집에 따르면 매창은 ‘1953년에 출생해 38세를 살고 1610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간혹 사전류나 일부 기록물에는 생존연대가 잘못 기록된 것이 있다. 이는 1917년 묘비를 개비하면서 잘못 새겼다는 것이 김형주 선생의 설명이다. 매창은 그가 평생 자식처럼 끼고 살았던 거문고와 함께 매창뜸에 묻혔다고 전한다. 묘비는 그녀가 죽은 지 45년이 지난 1655년에야 세워졌다. 250여년이 지나는 동안 비문의 자획이 마모돼 1917년에 부안지방의 시인묵객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다시 세웠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매창이 나고 죽은 해와 처음 비를 세운 연대를 잘못 계산해 한 갑자(60년)씩 올려 잡았다. 그래서 일부 기록에는 매창이 1513년에 태어나 1550년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이로 인해 매창이 황진이와 동시대, 동년배 사람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녀는 서른 여덟 해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당대의 문장가들과 사귀며 수백편의 주옥같은 시가를 남겼다. 특히 그녀가 남긴 시 중 지금까지 밝혀진 유일한 시조인 ‘이화우 흩날릴 제’는 규장각본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 이매창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나를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쾌라. 임을 그리워하는 별리가 중 절창으로 꼽히는 이 시조는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촌은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촌은 유희경은 노복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유성룡을 도와 나라에 충정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시에도 능통해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도 유명하다. 매창이 유희경을 만난 것은 기생이 된지 몇 년 되지 않은 임란 직전쯤으로, 그 후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정인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유희경을 여러 해 동안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한 그리움이 이 시조에 녹아나 있다. 매창은 교산 허균의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허균과는 시문과 인생관을 논하며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고 한다. 허균이 매창을 처음 만난 것은 1601년으로 매창의 나이 28세 때이고, 허균은 32세 때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남에서부터 서로 호감은 가졌으나 거리를 유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에 나타나 있다.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가 이 문집에 전해지고 있고, 1610년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율시 두 수를 지어 애도했다고 한다. ‘애계랑(哀桂娘)’이라는 시가 바로 그것이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허균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를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 곁을 찾아오려나 ‘매창집’은 매창이 죽은 지 58년이 지난 1668년 10월 부안의 아전들이 그녀의 한시 58수를 모아 상서 우금산성 아래 있는 개암사에서 간행했다. 그러나 58수 중 ‘윤공비(尹公碑)’라는 시는 매창의 시가 아니라 허균의 친구인 이원형의 시로 판명돼 실제로 전해지고 있는 매창의 시는 57수이다. 허균을 그리워하며 달 밝은 밤에 비석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슬피 노래를 부르고 있는 매창을 본 허균의 친구 이원형이 지나다가 ‘윤공비’라는 시를 지어 그녀를 위로했다는 것이다. 윤공비 - 이원형 한 가닥 거문고를 뜯으며 자고새를 원망하는데 거친 비석은 말이 없고 달마저 외로워라 그 옛날 현산에 세웠던 남녘 정벌의 비석에도 그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눈물 흘렸던 일이 있었나. 최근 매창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이같은 사실은 허균의 문집 ‘성수시화(惺峀詩話)에서 밝혀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매창의 문학‘을 왜곡시키는 일이 여태 자행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행은 그러한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또 다른 매창 시비가 있는 서림공원으로 향했다.
“‘백운사’라는 한시는 매창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문시집인 <매창집>에는 없는 시일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논증된 바도 없는 작자미상의 시입니다.” 김형주 선생이 매창시비의 오류를 지적했다. 김형주 선생은 이러한 문제를 부안군청과 지역신문에 여러 차례 밝히고 “이 시비를 개비하거나 철거를 건의했지만 여태 고쳐지지 않았다”며 군행정을 성토했다. 여류시인 이매창의 넉넉한 미소를 뒤로 하고 일행은 다음 기행지인 석정시인이 살았던 ‘청구원(靑丘園)’으로 향했다. 중학생 시절 2년간 석정시인에게서 국어를 배웠다는 김형주 선생을 통해 ‘목가시인’으로 알려진 석정 시인의 새로운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 ||||||||


김형주 선생과 부안기행 참가자들이 매창의 묘 앞에 있는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 염기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