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여기(女妓)의 상사(相思)의 단장곡(斷腸曲) - 유희경(劉希慶)과 계랑(桂娘)의 별한(別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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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劉希慶 )은 자(字)를 응길(應吉), 호(號)를 촌은(村隱)이라 하며, 본관은 강화(江華). 남언경(南彦經)의 문인으로 조선조의 대시인이요 학자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예론(禮論),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國喪)은 물론 평민들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그에게 문의했다 한다. 그의 그런 학문이 [촌은집(村隱集)]과 [상례초(喪禮抄)]를 남겼다. 선조 25년 임란(1592)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광해군 10년(1618) 이이첨이 폐모(廢母)의 소(疏)를 올리라고 강권하자 거절한 뒤에, 은거하며 후진의 교학에 전심하였다. 인조반정(1623) 때 절의(節義)로써 포상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고, 뒤에 아들 노민(勞民)의 공으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다. 계랑(桂娘)은 성(姓)이 이(李), 호(號)는 매창(梅窓) 또는 계생(桂生)이라고도 하며 본명은 향금(香今). 부안(扶安)의 이름난 기생이다. 한시에 능하고 거문고에 뛰어났다. |
이능화님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그녀의 시조라 하여 10수가 소개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이화우(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님 계랑은 당대의 대시인 유희경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촌은(村隱)이 상경한 후 소식이 끊겨, 계랑이 이 시를 짓고 이로부터 수절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작품이다. {계랑은 부안의 명기(名妓)인데, 시에 능하며 매창집(梅窓集)이 있다. 유희경의 사랑을 받았는데, 촌은이 상경한 후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짓고는 수절하였다.} 촌은은 어려서부터 효자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예론, 상례에 밝았음은 전술한 바이다.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러워서 {평생치학식동가(平生恥學食東家) 독애한매영월사(獨愛寒梅映月斜) 매창의 '차과객운(次過客韻)'이다. 일찍이 나그네가 매창의 이름을 듣고 시로써 유혹하자, 계랑이 이 시를 지어 전하니, 그 나그네가 탄한(嘆恨)하며 물러갔다 한다. 이만큼 고고한 그녀였다. 비 뒤의 산들바람 가을이 다가오네. {양후량풍옥단추(兩後凉風玉簞秋) 일수명월부루두(一輸明月부樓頭) 두메의 오막살이 사립문 닫았는데 {석전모옥엄시비(石田茅屋掩柴扉) 화락화개변사시(花落花開辨四時) 그녀가 외로움을 달래며 지은 [추사(秋思)]와 [한거(閑居)]란 시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정이, 열아홉 계랑의 시름이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거문고와 시작으로 소일하고 있을 때 이부사에게 전갈이 온 것이다. 기방의 생활을 청산하고 자연 속에 묻혀 지내겠다던 계랑이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곧 부안에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만나보고 싶은 촌은이었다. 그 장본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보낼 수 없는 그녀였다. 봉래산 북쪽엔 흰 눈이 쌓였는데 {설적봉산북(雪積蓬山北) 치매미방화(穉梅未放花) 이부사에게 보낸 [呈 李使君]이란 시다. 봉래산엔 아직도 피지 않은 매화가 계랑의 마음 속엔 핀 것이다. 촌은을 만날 수 있다는 전갈을 받은 계랑은 문자 그대로 안절부절이었다. 그때의 심정을 잘 나타낸 시가 있다. 가슴에 품은 정은 말도 하지 못하더니 {함정환불어(含情還不語) 여몽부여치(如夢復如痴) 유희경이 부안에 온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의 일이다. 술이 거나해지자, 촌은이 계랑에게 거문고를 재촉한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거문고를 끌어 당겼다.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황하의 물은 천상에서 와서 흐르나, 거문고 소리에 따라 이백의 [장진주(將進酒)]가 유랑하게 흘러 넘친다. 노래가 점점 황홀경으로 어울려 간다. 지그시 눈을 감고 듣던 촌은이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일찍이 남국의 여랑(女娘) 계랑의 이름 들어 {증문남국계랑명(曾聞南國癸娘名) 시운가사동낙성(詩韻歌詞動落城) 나에겐 신기로운 선약(仙藥)이 있어 {아유일선약(我有一仙藥) 능의옥협빈(能醫玉頰瀕) 어두운 마음, 찡그렸던 얼굴을 미소짓게하는 선약(仙藥).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묘약이 아니겠는가. '사랑'이란 말을 직선적으로 쓰지 않고 '선약(仙藥)'에 비유해 가며 은밀하게 표현한 것은 풍류객의 운치요 멋이다. 그것을 못 알아차릴 계랑은 아니었다. 자작시를 가락에 맞춘다.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가 있어서 {아유고주쟁(我有古奏箏) 일탄백감생(一彈百感生) 그날밤 거문고와 시로 화답하며 밤 깊어 원앙침에 들었다. 열아홉 터질 듯한 계랑의 몸이 노년의 촌은의 품 속에서 더욱 무르익어 갔다. 50평생의 지조가 계랑으로 인해 무너져 가는 촌은이었다. 계랑은 오랫동안 굳게 닫아 두었던 비밀의 문을 활짝 열어 정다운 임의 정열을 마음껏 받아들였다. 촛불이 펄럭 문풍지를 새어드는 바람에 꺼졌다. 거친 숨소리만 어둠 속에 높아 갔다. 창 밖에 가마솥 때우라고 외치는 저 장사야, {창(窓) 밧끠 감아솟 막키라는 장사 이별 나는 굼멍도 막키옵는가. 평생에 다시 만날지 모르는 두 사람, 그들에게도 이 말은 적용되어야 하는가! 그날 두 사람의 이별을 하늘도 알았던가. 부슬비가 내렸다. 나귀등에 올라탄 촌은을 붙잡으며 하룻밤만 더 묵어 가기를 간청하는 계랑의 얼굴에 흐르는 물은 눈물인가 빗물인가! 울며 잡은 소맷자락을 무정히 떨치고 가지 마오. {울며 불며 잡은 사매 떨떨이고 가들 마오. 이것이 계랑의 심정 그대로다. 어느 무명 시인의 하소연이 그대로 계랑의 심정이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이여, 단장(斷腸)의 하소연이다. 사무친 애정의 절규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촌은에게서는 일자 소식이 없다. 정말 계랑을 잊었는가. 아니면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지나쳐 버린 여인이었는가. 그러나 계랑은 한번 지나쳐간 풍류랑(風流郞)으로만 생각할 수 없었다. 너무도 깊은 정을 주었던 촌은이었다. 그녀의 그리움은 한이 없다. 창오산(蒼梧山)이 무너지고 상수(湘水)가 말라야 이내 시름없을 것을, {창오산붕(蒼梧山崩) 상수절(湘水絶)이라야 이 내 시름 업슬 거슬 이별이 하 설어워 문 닫고 누웠어도 {이회소소엄중문(離懷消消掩中門) 나신무향적누흔(羅神無香適淚痕) 앞에 것은 [병와가곡집]에 보이는 매창의 시조요, 뒤에 것은 [매창집]에 보이는 매창의 [춘우(春雨)]다. 헤어진 그대는 아득히 멀어 {일별가인격초운(一別佳人隔楚雲) 객중심서전분분(客中心緖轉紛紛) 계랑은 촌은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반가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다. 자신을 잊고 있지 않음이 고마웠다. 기러기를 산 채로 붙잡아서 정들이고 길들여서, {기럭이 산이로 잡아 정 드리고 길 뜨러져 날아가는 기러기에게 촌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싶었고, 자신의 이 보고픔을 전해 주고 싶다는 하소연도 끝내는 이뤄지지 못한 채, 계랑의 몸은 더없이 수척해 갔다. 완전히 자리에 눕고 말았다. 끝내 촌은을 그리는 상사(相思)의 정은 그녀를 소생시키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했다. 풍진 세상 고해에는 시비도 많아 {진세시비다고해(塵世是非多苦海) 심규영야고여년(深閨永夜苦如年) 이것이 계랑의 마지막 절필시(絶筆詩)였다. 촌은을 애타게 그리다가 죽어 간 여인의 피맺힌 응어리다. 촌은은 이 시를 쓰면서 죽어 갔을 여인을 생각해 본다. 한 여인의 절실한 애정을 받아 주지 못했던 자신이 한스러웠다. 그토록이나 뜨거웠던,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기로웠던 계랑. 그는 붓을 들어 자탄과 후회가 가슴 저미는 아픔을 썼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섭 계랑아 {명모호치취미랑(明眸皓齒翠眉娘) 홀축부운입묘망(忽逐浮雲入杳茫) 한 많은 여인 계랑은 갔다. 짧은 며칠간의 애정 속에서 정염을 채 사르지도 못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갔다. 그 해가 명종 5년(1550), 서산에 지는 해도 슬펐는가. 촌은을 이별하던 날처럼 부슬비가 뿌렸다. 묘한 싯구는 비단을 자아내고 {묘구감리금(妙句堪璃錦) 청가해주운(淸歌解駐雲) 처절한 반희(班姬)는 부채만 흔들고 {처절반희비(凄絶班姬扉) 비량탁여금(悲凉卓女琴) [애계랑(哀桂娘)]의 두 수다. 지나친 고사의 인용이 험이나, 계랑을 항아(姮娥).설도(薛濤)에 비유하고 그녀의 죽음을 탄식하고 있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인데 시를 잘 짓고 음율이 뛰어났으며, 또 거문고를 잘 탔다. 성품이 고개(孤介)하여 음란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시재를 사랑하여 사귀되 막역한 사이였다. 비록 웃고 희롱하였어도 음한한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오래 사귀였으나 그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죽음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여, 두 수의 시를 지어 슬픔을 대신한다.] 라는 허균의 기록에서도 계랑의 뛰어난 시재와 그 정숙한 몸가짐을 알 수 있다. 상중에도 기방에 출입하여 정적(政敵)의 험구의 的이 되었던 교산(蛟山)이 '수탄소압희(雖恢笑狎戱) 불급어란(不及於亂)'한 사이인 것을 보면, 그 음란한 정도가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범연하게 접할 수 없었던 계랑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촌은에게 향한 계랑의 애정을 알았기 때문일까.... 허균이 다녀간 후로 계랑이 촌은을 배반하고 교산과 가까와졌다는 풍문이 퍼지기도 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촌은, 그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잘못은 없다 해도 풍설이 도니 {오피부허설(誤被浮虛說) 환위중구훤(還爲衆口喧) 계랑이 지은 [부풍설(浮風說)]이다. 이 시에서도 촌은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겠다. 교산과의 관계를 변명하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嫂詩話)]에서 유희경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희경은 본시 천예(賤隸) 출신인데, 사람됨은 성품이 청정하여 주인을 섬김에 충성스럽고, 어버이를 섬김에 극진한 효로써 하니 사대부들이 그를 많이 좋아하였다. 시에 능하였는데, 그 시는 심히 순수하고 원숙하니, 젊어서 갈천훈(葛川薰)을 따라 광주에 살면서 석천루에 올라 그 누각에 제자(題字)를 쓰되, 대잎에 아침이슬 기울었는데 {죽엽조경로(竹葉朝傾露) 송초효괘성(松梢曉掛星)} 라 하였다. 양송천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매창의 묘는 부안읍에서 2킬로쯤 떨어진 봉덕리 공동 묘지에 있는데, 부안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이 있는 곳을 공동묘지라 부르지 않고 특별히 '매창의 등'이라 부르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부안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존경심을 알 수 있다. 묘지명에 보면 매창이 죽은 지 45년 후인, 1655년 부안의 시인 단체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처음으로 비(碑)를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 왔는데, 그 후 3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마멸되어, 1917년 두 번째로 세운 것이 지금의 묘비라 한다. 또 부안의 유지들이 '매창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1974년 봄에 부안읍의 진산인 상소산 기슭의 서림공원에 시비를 세웠는데,그 공원은 본디 부안현감의 관사였던 선화당 후원의 일부로, 일찍이 매창이 조석으로 거닐던 곳이어서 더욱 뜻깊은 곳이라 한다. 시비는 높이가 여섯 자에, 두 자 가량의 너비로 흰 대리석 복판에 오석(烏石)으로 '매창시비'라고 새겼고, 그 아래에 매창의 시조 [梨花雨 흣뿌릴 제...]가 송지영님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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