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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50회 연재를 마치면서 : 무오사화 재정립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50회 연재를 마치면서 : 무오사화 재정립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5.12.0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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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부터 2025년 11월 하순까지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에  대하여 49회 연재하였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에 일어난 조선 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 (戊午士禍)는 사관(史官) 김일손(1464∽1498)이 쓴 사초(史草)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에 戊午史禍(무오사화)라고도 불린다.

무오사화는 1498년(연산군 4) 7월 1일부터 7월 27일까지 전개되었다. 연산군이 김일손을 친국한 7월 12일부터 따지면 15일 만에 종결되었는데, 사화는 시작부터 비밀스럽고 돌발적이었다.

그러면 『연산군일기』를 중심으로 무오사화 전개과정을 일자별로 정리하여 보자. 

o 7월 1일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유자광이 연산군에게 비사(秘事)를 아뢰었다.  이 자리에는 사관(史官)도 참석하지를 못했다. 이윽고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도사 신극성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외부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o 7월 11일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를 들여올 것을 명하니 이극돈 등이 일부를 절취하여 올렸다. 
o 7월 12일

연산군이 김일손·허반을 잡아들여 『성종실록』의 권 귀인과 윤 소훈의 일을 직접 캐물었다. 또한 소릉(단종 모친 능)에 대하여도 물었다.

이윽고 유자광의 심문으로 김일손은 사초에 기록한 이개·박팽년·하위지의 일에 대해 말하였다.

o 7월 13일

김일손은 사초에 기록된 노산대군(단종)의 일에 대하여 공초하였다.

“사초(史草)에 이른바 ‘노산(魯山)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斂襲)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최맹한에게 들었습니다.

신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서 쓰기를 ‘김종직(金宗直)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것이 있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드디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썼습니다."

이 날 연산군은 대간들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는 것을 대간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o 7월 15일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뢰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의의(議擬 의논하고 헤아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o 7월 17일

조정 신하들은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처벌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부관참시하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사헌부 집의 이유청·사간원 사간 민수복 등 대간(臺諫)들은  김종직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하자는 가벼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자 연산군은 즉시 대간들은 체포하여 대신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형장 30대를 때렸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에서 대간들이 직접 처벌된 첫 번째 사례였다.

o 7월 21일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 어세겸·이극돈·유순·홍귀달·윤효손·허침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변명하였다.

이 날 연산군은 대간들을 다시 국문하라고 명했다.

o 7월 22일

추관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관련하여 권오복·권경유를 심문하였다.

o 7월 23일

연산군은 김종직이 저술한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o 7월 26일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하였다.

밤에 큰 바람이 불고 큰비가 물 쏟듯이 내렸다. 

o 7월 27일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알리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中外)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지은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고,  김일손·권오복·권경유은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했다.

이목과 허반은 참형(斬刑) 당했고, 참형을 면한 강겸, 난언(亂言)을 범한 표연말·홍한·정여창·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등과 난언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강경서 등,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은 박한주· 임희재·강백진·이계맹·최부·이원·김굉필등은 유배를 갔고, 김종직에 가벼운 처벌 의견을 낸 사헌부 장령 유정수, 집의 이유청, 사간원 사간 민수복, 등 대간(臺諫) 9명도 유배되었다. 

또한 실록 편수에 참여한 편수관 중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은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아 파직되었고, 홍귀달·조익정·허침·안침은 좌천 되었다.

연산군이 처벌한 죄목은 붕당(朋黨)과 난언(亂言)과 능상(凌上)이었다.
붕당은 김종직 일파가 사제관계로 뭉쳐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이고, 난언은 유언비어를 날조했다는 것이며, 능상은 임금을 비롯한 윗사람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난언은 대부분 세조와 관련된 반인륜적인 처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요컨대 무오사화 희생자는 51명이었는데 사형은 6명(11.8%), 유배 31명(60.8%), 파직 · 좌천이 14명(27.4%)이었다.희생자 51명의 구성을 살펴보면, 김종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은 24명(47.1%), 대간이 9명(17.6%), 실록 편찬에 관련된자 8명(15.7%),  대신과 종친이 10명(19.6%)이었다.

# 무오사화는 훈구파가 사림파를 숙청한 사건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기백 교수(1924∼2004)의 『한국사신론』을 읽어보자.

“정계에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이것이 드디어는 사화를 낳게 하였다.

첫 사화는 연산군 4년(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史禍)였다. 이를 특히 사화(史禍)라고 적는 것은 그것이 사관(史官)들이 적어 둔 초벌 원고인 사초(史草)에 기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은 사관으로 있으면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다. 김종직이 단종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의제에 비기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 「조의제문」이었다. 연산군 초에 『성종실록』의 편찬을 위한 실록청을 구성하여 사국(史局)을 열었을 때 위의 사초가 발견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을 충동하여 김일손 등의 사림 학자를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 보냈다. 이로 인하여 사림들의 세력은 크게 꺾이게 되었다. ”(이기백 지음, 한글판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9, p 227-228)

‘표준국어대사전’도 마찬가지다.

“조선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에 대해서 일으킨 사화.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로,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을 트집 잡아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목을 베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무오사화 전개 과정에서 살폈듯이 대간들의 피화(被禍)를 간과하고 있어 소장 학자들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김범은 2015년에 발간한 『사화와 반정의 시대』에서 무오사화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요컨대 무오사화는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집단을 동시에 처벌하고 경고한 복합적 사건으로 생각된다. 연산군 치세 직후부터 삼사와 끊임없이 충돌한 연산군과 주요 대신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권력 행사가 제한되는 상황을 타개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일손의 사초가 발견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기화(起禍) 세력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를 능상과 붕당이라는 공통된   죄목으로 연결시켰고 그런 절묘한 논리를 현실적 숙청으로 반영시키는데  성공했다.”(김범 지음,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5, p 123-127)

민음사가 발간한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책도 김범과 같은 입장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서 시작해 김종직 문인을 붕당으로  규정하고 일부 대간들을 능상(凌上)의 명목으로 단죄한 사건이다.”    (강응천 외 지음,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민음사, 2014,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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