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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김세곤의 반(反)부패] 목민심서톺아보기(20)- 제2부 율기6조 제2조 청심(淸心) (10)

[김세곤의 반(反)부패] 목민심서톺아보기(20)- 제2부 율기6조 제2조 청심(淸心) (10) 

  • 기자명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전문강사)  
  • 입력 2025.05.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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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전문강사)  

『목민심서』 「율기(律己) 6조」 ‘제2조 청심(淸心)’ 읽기를 계속한다. 

「무릇 본읍(本邑)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건은 반드시 고을에 폐단이 될 것이니, 하나도 안 가지고 돌아가야만 청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당개(唐介)가 담주통판(潭州通判)으로 있을 때에 한 대상(大商)이 진주〔蚌胎〕를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다가 관리(關吏 관문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수색을 받게 되었다. 태수(太守) 이하가 그 값을 낮추어서 모조리 스스로 사들였다. 뒤에 진주를 나누어 가진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인종(仁宗)이 측근에게 “당개는 결코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다시 조사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당개는 송나라 인종ㆍ영종ㆍ신종 때 사람으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있을 적에 직간(直諫)하였으며, 담주통판, 복주(復州)ㆍ양주(揚州)의 지주(知州)를 지냈다.)  

당나라(唐 618~907) 계주(桂州; 광서성 계림현) 도독(都督 주의 군무를 맡아보는 무장) 이홍절이 죽자 그 집에서 진주를 팔았다.  당 태종(太宗)이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은 재상이 청렴하다고 말했던 사람인데 진주를 팔고 있으니 그를 천거한 사람이 어찌 죄가 없겠는가.” 하였는데,  위징(魏徵)이 그 천거한 사람을 구해 풀어 주었다. 

 
 

당태종이 처벌하라고 한 사람을 위징이 풀어주었다니, 당대종을 이긴  위징은 참으로 대단한 신하이다. 

당태종(598~649 재위 626~649) 이세민(李世民)은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룬 당나라 제2대 황제이고, 위징(魏徵 580∽643)은 당 태종을 도와 태평성대를 만든 신하로 직언으로 유명했다.  

(당태종의 이름 세민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원래 위징은 황태자 이건성의 부하였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독살하여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이건성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고조 이연을 알현하여,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이 결탁하여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아뢰었고, 이연은 지체없이 그들을 황궁으로 불렀다. 그들이 황궁의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였다.  이것이 '현무문의 변'이다. 2개월 후에 고조 이연은 양위하였고, 9월 4일에 이세민은  황제에 올랐다. 

이러자 위징은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위징을 문책하던 중, 위징이 주군을 보필하기 위한 충신의 도리임을 당당하게 말하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기에, 당태종은 위징을 신하로 기용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나서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지만,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약 60일간 사투(死鬪)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결국 당나라 대군은 회군하였다. 

당 태종은 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탄식하였다 한다. (위징은 643년에 죽었다. 그는 살아 있었을 때 당태종에게 고구려 정벌을 극력 반대하는 직언을 하였다.)

오긍이 편찬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는 당 태종과 위징의 대화가 여러개 수록되어 있다. 이 중 한 가지를 살펴보자.  

「어느날 위징이 당태종에게 말했다.

“저는 충신(忠臣)보다는 양신(良臣)으로 남고 싶습니다.”

이러자 당태종이 물었다. 

“충신과 양신이 무슨 차이요?”  

위징이 답했다. 

“양신과 충신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양신은 스스로 아름다운 명성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좋은 명성을 얻게 만들기 때문에 그 영예가 대대로 전해지지요. 그러나 충신은 군주께 심한 간언을 하여 자신은 물론 일족도 몰살당하고, 군주는 폭군이란 악명을 쓰고 국가가 멸망합니다. 이때 충신이 얻는 것은 공허한 명성 뿐입니다.”」

위징이 죽은 후, 당 태종은 애통해 하면서 측근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잡고, 옛것을 거울로 삼아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으니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