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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독일 프랑크푸르트(40) 슈테델 미술관- 르누아르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독일 프랑크푸르트(40) 슈테델 미술관- 르누아르

  • 기자명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 입력 2025.04.1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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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슈테델 미술관에서 르누아르, 드가, 마네 그림을 보았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진을 제대로 찍지 않아 누구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인상주의 화가 그림들. 사진=김세곤 제공

먼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그림부터 살펴보자. 제목은 <점심식사를 마치고>인데 1879년에 그린 것이다.

르누아르, 점심식사를 마치고, 1879년. 사진=김세곤 제공

두 여인과 한 남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 그림은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올리비에의 정원에서 그린 것으로 올리비에의 정원 벽에는 시골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최병진 옮김, 르누아르, 마로니에북스, 2009, p 53)

이 그림을 그린 1879년은 르누아르에게는 생계가 넉넉해진 시절이었다. 1878년에 그린 <아이들과 함께 있는 샤르팡티에 부인>이 ‘살롱전’에서  호평을 받았다.

 
 
르누아르, 아이들과 함께 있는 샤르팡티에 부인, 1878년, 153.6*190cm, 뉴욕 메트로롤리탄 미술관. 사진=김세곤 제공

샤르팡티에 부인 마그리트 르모니에는 모파상 · 졸라 등의 작품을 출간한 출판인 조르주 샤르팡티에와 1872년에 결혼했는데 그녀는 언변 좋고 교양있는 부인이었다. 

1875년 드루오 경매에서 르누아르 그림 3점을 구입한 샤르팡티에 부부는 르누아르 옹호자가 되었다. 사르팡티에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샤르팡티에 부인>을 ‘살롱전’에 입상할 수 있도록 로비했을 뿐만 아니라, 잘 보이는 장소에 전시하도록 도와주었다. 평단과 관람객들은 생동감과 따뜻한 색조,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을 감각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소피 모네레 지음,정진국·문봉섭 옮김, RENOIR, p 76-77)

한편 르누아르는 행복하고 즐거운 그림을 그린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금수저가 아니었다. 그는 1841년에 도자기 산지인 프랑스 중서부 리모주에서 가난한 재단사의 일곱 자녀중 6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가정이 너무 가난해서 13세 때부터 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직공으로 일했다. 

1862-1864년에 르누아르는 에콜 데 보자르(국립 미술학교)와 글레그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는데, 글레그의 화실에서 바지유, 시슬레, 모네를 알게 되었다. 1868년에 르누아르는 마네, 드가를 만났고, 1869년에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며 최초의 인상주의 풍경화 <라 그르누예르>를 그렸다. 

1870년 7월에 프러시아-프랑스 전쟁(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르누아르는 1870년 7월부터 1871년 3월까지 보르도의 기병으로 근무하였다. 그런데 그를 지원해준 화가 바지유(1841∽1870)가 전사(戰死)했다. 

르누아르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특별관람석>, <파리여인>등  유화 6점과 파스텔 드로임 1점을 출품하였다. 그런데 <특별관람석 >이 주목을 받았다. 

르누아르, 특별관람석, 1874년, 80*63.5cm,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미술관. 사진=김세곤 제공

모델은 니니 괼르 드 래와 동생 에드몽 르누아르였다. 한 비평가는 이렇게 찬사를 보냈다.

“르누아르는 선구적이다. 그는 오늘날까지 회화에서 다루지 않았던 현대생활의 한 모습인 연극을 자연스럽게 잘 묘사하고 있다.” 

(소피 모네레 지음,정진국·문봉섭 옮김, RENOIR, p 60-61) 

1876년 3월 30일에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에는 모네, 르누아르, 드가, 시슬레, 피사로 등이 참가했다. 하지만 흥행은 실패했다.

1876년 7월에 르누아르는 드루오 경매에서 그림을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몽마르트 코르토 가(街) 12번지 커다란 정원으로 둘러싸인 집을   월세 100프랑으로 임대했다. 그는 이 정원에서 <그네>를 그렸다. 

그림에는 17세 소녀 잔 마르고가 그네를 잡고 있고,  화가 노베르 고에노트가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다. 그 옆에는 한 남자와 어린애가 있고, 뒤에는 두 쌍의 남녀가 담소하고 있다. 

르누아르, 그네, 1876년, 92 * 73 cm, 파리 오르세미술관(1894년에 화가 키유보트의 유증으로 입수). 사진=김세곤 제공

특히 르누아르는 1876년에 명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그렸다. 이 그림은 루느아르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고 인상주의 회화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언급된다.  

그림은 커다란 캔버스에 현장에서 그려졌으며, 르누아르의 절친들이 그림 모델이 되었는데, 그림을 그리는데 6개월이 걸렸다.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물랭(물방앗간) 드 라 갈레트는 오래된 풍차시설을 개조한 야외 무도회장으로 소박한 파리 중하층 사람들과 보헤미안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루느아르는 여름 오후, 무려 200여 명의 사람들이 즐겁게 춤추고 술 마시고 담소하는 모습을 빠른 붓놀림과 색감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르누아르, , 1876년, 131*175cm,     파리 오르세미술관  (1894년에 화가 키유보트의 유증으로 입수). 사진=김세곤 제공

필자도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감상했는데, 르누아르의 말을 상기해보자. 

“그림이라면 모름지기 

 사랑스럽고 신나고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 즐거움!

살면서 골칫거리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또 만들 필요가 있나.”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지음 · 서희정 옮김, 인상주의, 미술문화,  2021, p 32-33)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했는데,  전시회는 실패였다. 

이후 ‘살롱전’을 선호한 르누아르는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았고, 1880년 제5회, 1881년 제6회 인상주의 전시회에도 출품하지 않았다. 1880년에 그는 사고로 오른팔이 부러졌으며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1881년과 1882년에 루느아르는 알제리와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르네상스 회화 (특히 라파엘로)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후 르누아르는 전통적인 인상주의 화법을 버린 후 독자적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 참고문헌 )
o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최병진 옮김,르누아르, 마로니에북스, 2009
o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하지은 옮김,인상주의, 마로니에북스, 2009
o 소피 모네레 지음,정진국·문봉섭 옮김, RENOIR, 열화당, 1990 
o 페터 파이스트 지음 · 권영진  옮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마로니에북스, 2005 
o 안드레아 디펠 지음 · 이수영 옮김, 인상주의, 예경, 2005
o 헤일리 에드워즈 뒤자르댕 지음 · 서희정 옮김, 인상주의, 미술문화,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