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23회 김종직의 「도연명의 술주 시에 화답하다」시를 해석하다.
- 기자명 푸드n라이프
- 입력 2025.02.28 09:11
- 수정 2025.02.28 09:13
무오사화와 사관 김일손 - 23회 김종직의 「도연명의 술주 시에 화답하다」 시를 해석하다.
김세곤(역사칼럼니스트/청렴연수원 등록 청렴 전문강사)
김종직이 지은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和陶淵明述酒]’ 시를 읽어보자.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鼎鐺猶有耳
사람이 어찌 듣지를 못하리오 人胡不自聞
임금과 신하는 존비가 달라서 君臣殊尊卑
하늘과 땅의 자리가 나누어졌네 乾坤位攸分
간악한 이름은 반역을 한 때문이라 奸名斯不軌
멸족되어 후손이 끊어져 버리고 赤族無來雲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當時馬南渡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神州餘丘墳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天心尙未厭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有若日再晨
처중이 맨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處仲首作孼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狼子非人馴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蚩蚩遺臭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斅兒戕厥身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四梟者何功
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天報諒殷懃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婉婉安與恭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乃是劉氏君
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蒼天謂可欺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高把堯舜薰
선위를 받는게 끝내는 역적이였네 受禪卒反賊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미어 史氏巧其文
사령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서 諉以四靈應
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하니 宗岱且祠汾
거짓 천명을 만들 수는 있으나 僞命雖能造
세상의 혼란은 의당 분분하였지 世亂當紛紛
천리란 본디 순환하길 좋아하기에 好還理則然
소가 마침내 천친을 멸하였도다 劭也蔑天親
술주시에는 은어가 하도많으니 述酒多隱辭
팽택에게 비할 자가 없겠구려 彭澤無比倫
「화도연명술주」시는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6구, 8구, 8구, 6구,
2구로 이루어졌다.
그러면 시를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첫 단락 6구이다.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鼎鐺猶有耳
사람이 어찌 듣지를 못하리오 人胡不自聞
솥(정 鼎)은 발이 세 개이고 귀가 둘 달린 도구이다. 음식을 익히는데 쓰다. 그런데 귀가 두 개나 달린 솥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물이기 때문에 인지(認知) 능력이 없다.
사람은 인지 능력이 있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라도 염치(廉恥)가 없으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죄의식이 전혀 없다.
임금과 신하는 존비가 달라서 君臣殊尊卑
하늘과 땅처럼 자리 나누어졌네 乾坤位攸分
임금은 하늘이고 신하는 땅이라는 신분의 높낮이가 있다. 하지만 임금과 신하는 각기 직분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임금은 하늘의 덕 즉 원융(圓融)한 덕을 지니고 신하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
간악한 이름은 반역을 한 때문이라 奸名斯不軌
멸족되어 후손이 끊어져 버렸네. 赤族無來雲
여기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드러난다. “착한 일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를 남기고, 착하지 않은 일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을 남긴다.” 즉,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지은 뒤의 결과가 복(福)과 화(禍)이다.
악업 가운데서 가장 나쁜 것은 반역(叛逆 배신)이다. 전제왕조(專制王朝)에서 신하는 임금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신하는 그 임금이 좋은 정치를 하도록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어도 왕권에 도전하여 왕조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역성혁명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설령 반역하여 권력을 잡았을지언정, 세월이 지나면 그 간사한 이름은 영원히 역사에 남는다.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은 멸족이 되어 후대가 끊어진다. 그만큼 조상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천벌(天罰)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신하가 임금을 내쫓거나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경우가 가끔 있다. 그 사례로 도연명과 김종직은 유유(劉裕 363~422)가 동진(東晋 317-420)의 공제(恭帝)를 419년에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빼앗고 다시 공제를 시해한 사실을 언급했다.
이는 우의(寓意)에 지니지 않는다. 실제 김종직의 의도는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그를 죽인 세조(世祖)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유유를 세조, 공제를 단종에 비유한다면 세조는 단종을 시해한 간악한 이름의 반역자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성삼문 · 박팽년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 유응부 같은 사육신이 나와 절개를 지킨 것이다.
반면에 신숙주는 변절자로 역사에 남았다. 오죽하면 변질하기 쉬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 하였을까?
다음은 두 번째 단락 8구이다.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當時馬南渡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神州餘丘墳
사마씨(司馬氏)는 위(魏) · 오 · 촉나라가 다투는 삼국(三國) 시대 위나라의 명장인 사마의(司馬懿 179~251 사마중달로 잘 알려짐)의 손자 사마염(司馬炎 236~290)이다.
서기 265년에 위나라 원제(元帝) 조환(曹奐 246∽303)은 성대한 의식을 베풀고 사마염에게 양위 조서를 발표하였다. 위나라는 조조가 화북을 통일하고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의 마지막 임금인 헌제(獻帝)의 자리를 빼앗아 220년에 세운 나라이다.
“고대의 성군 요·순의 교훈에 따라 임금의 자리를 어진 신하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하겠노라.”
양위식에서 사마염은 조비가 후한의 헌제로부터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은 때와 마찬가지로 세 번 사양의 뜻을 표한 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진(晋)이라 일컫고 수도를 낙양에 정하였다.
진나라는 280년에는 동오(東吳)를 멸망시키고 삼국(三國)을 통일했으나, 316년에 이르러 한(漢)의 유요(劉曜)의 침략을 받아 진은 멸망하였다.
이러자 317년에 황실의 후예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 276~323)가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에서 진(晉)왕조를 다시 세웠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마염이 세운 진을 ‘서진(西晉)’이라고 부른다.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天心尙未厭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有若日再晨
천심은 말할 것도 없이 한나라의 부흥을 두고 한 말이다. 한나라의 유요(劉曜)가 진을 멸망시킨 것은 정통(正統)이었다. 중국은 한나라 황실을 정통으로 여겼다.
처중이 맨 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處仲首作孼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狼子非人馴
시에 ‘처중은 왕돈(王敦)이다, 이리 새끼는 소준(蘇峻)’이라고 김종직은 원주(原註)를 달았다. 김종직은 왕돈과 소준을 내세워 반역의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처중은 왕돈(王敦)의 자인데, 그는 동진의 원제(元帝) 사마예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뒤에 공을 믿고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면서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소준(蘇峻)은 동진의 원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는데, 3대인 성제(成帝) 때에 반역하여 관군(官軍)을 차례로 물리치고 임금을 석두성(石頭城)에 내쫓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도간(陶侃) 등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蚩蚩遺臭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斅兒戕厥身
원주) 환온(桓溫) 부자(父子)이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다. 그는 권세가 극에 달하자, 반역할 생각을 품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사나이가 백세에 좋은 명성을 전하지 못할 바엔 또한 악명이라도 만 년에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온은 은밀히 왕위 찬탈을 꾀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의 아들 환현(桓玄) 또한 막대한 권력으로 동진의 안제(安帝)에게 선위(禪位)를 받고 자칭 황제가 되었다. 404년에 유유(劉裕)는 곳곳의 호걸들과 연계해 환현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유유의 군대는 비록 2천 명에 불과했지만 용맹하여 복주산 싸움에서 환현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그런데 환현을 토벌한 유유(劉裕 363~422, 재위 420∼422)는 420년 7월에 동진의 공제(恭帝)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송나라를 세웠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국민권익위원회 청렴 강사>

▲ 1953년생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전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석사), 영국 워릭대 대학원 노사관계학과(석사) 졸업
▲ 1983년 행정고등고시(27회) 합격
▲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 근무
▲ 2011년에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고위공무원)으로 퇴직
▲ 2011.9-2013.6 한국폴리텍 대학 강릉 캠퍼스 학장 역임
▲ 저서로는 <대한제국망국사 (2023년)> <거북선을 만든 과학자 나대용 장군 평전 (2023년 비매품)> <아우슈비츠 여행(2017년)>, <부패에서 청렴으로(2016년)>,<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2>·<정유재란과 호남사람들>, <임진왜란과 장성 남문의병>,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義의 길을 가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 박광전>, <청백리 박수량>, <청백리 송흠>, <송강문학기행 - 전남 담양>, <남도문화의 향기에 취하여>, <국화처럼 향기롭게>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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