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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의 후손들

순례자의 노래 (1)- 김시습 · 남효온 · 김일손의 중흥사 회합- (2)

순례자의 노래 (1)

- 김시습 · 남효온 · 김일손의 중흥사 회합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0년 가을,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삼각산(지금의 북한산) 중흥사에 나타났다. 1483년에 수락산에서 서울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중흥사는 김시습이 과거 시험 공부를 하다가 1455년 윤 6월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떠났던 곳이다.

 

이율곡이 1582년에 선조의 명을 받아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의 관련 부분을 읽어보자.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본관은 강릉이다. (...)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성품이 남달리 특이하여 생후 8개월 만에 혼자서 글을 알았다. 최치운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시습(時習)’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경태(景泰 명나라 태종 연호)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과 현릉(顯陵 문종)께서 차례로 붕어하시고 노산군(魯山君 단종)3년만(1555년 윤 611)에 양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시습의 나이 21세였다.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서울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단종의 양위 소식을 듣고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다가 방성통곡한 다음에 읽고 쓰던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고, 광기(狂氣)를 일으켜 똥통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불문(佛門)에 의탁(依託)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의 호는 여러 번 바뀌었으니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峰)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율곡전서 제14/ 잡저)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학 사상의 핵심인 왕도정치의 붕괴였다. 주공이 되겠노라고 한 수양대군의 언행은 거짓이었다.

 

이때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술을 가지고 탁영 김일손(14641498)과 함께 찾아왔다. 남효온과 김일손은 김시습과 구면이었다. 김시습이 삼각산에서 지낼 때 자주 만났다.

 

중흥사에서 세 사람은 5일간 같이 지냈다. 당시의 정황이 김일손의 조카 김대유가 편집한 탁영선생연보(濯纓先生年譜)에 나온다.

 

세 사람은 밤새 담소하고 함께 백운대에 등정하고 도봉에 이르렀는데 무려 닷새 동안을 같이 보내고 헤어졌다. 그때의 담론이 모두 없어져서 전하지 않는데 혹시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 그러한 것인지 알 수 없다.”(성종 219월 경신)

 

세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은 단종애사(端宗哀史)에 대하여 이야기 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단종과 사육신 그리고 소릉(단종 모친 권씨의 능)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있는 것은 김시습 때문이다. 145668일에 군기감 (지금의 서울시청 동쪽) 앞에서 성삼문·유응부·이개·하위지 등이 두 대의 수레로 사지가 찢기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과 집에서 자결한 유성원의 시신이 거열 당한 것도 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이들의 시신을 수습에 나서지 않았다. 이때 김시습이 나섰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시습은 성삼문·박팽년·유응부·성승 등 다섯 시신(한 사람은 미상이다. 일설엔 이개라고도 한다.)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한다.

 

사육신이 충절의 아이콘이 된 것은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14784월 성균관 유생 시절에 소릉 복위 상소를 남효온은 1489년에 고향 의령에서 육신전(六臣傳)을 지었다. 그는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였으나,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하고 붓을 들어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을 집필했다.

 

14904월에 김일손이 교정을 보았다. ‘탁영선생 연보에 나온다.

 

“14904월에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초안을 사관(史館)승정원일기에 의거 해 다시 고쳐 짓고 집안에 깊숙이 갈마두다

 

14903월에 승정원 주서 및 예문관 검열에 제수된 김일손은 경연에 입시하여 노산군(단종)의 후사를 세울 것을 주청하였고, 사관에 입직하여 사초를 닦으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하였다.

 

 

순례자의 노래 (2)

- 비운의 임금 단종 이야기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909월에 김시습(14351493)과 남효온(14541492) 그리고 김일손(14641498)은 북한산 중흥사에서 5일간 함께 지냈다. 세 사람은 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는 주로 김시습이 하였으리라.

 

1455년에 중흥사를 나와 여러 곳을 떠돌던 김시습은 한동안 강원도 금화(金化) 사곡촌 (지금의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초막동)에 머물렀다. 이곳은 전 병조판서 박계손(14151475)이 부친 박도(13961459)와 형 박인손, 숙부 박제와 박제의 세 아들 박규손 ·박효손 ·박천손 등 박씨 일가 일곱 명이 은거한 곳이다. 영해박씨 일가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후손으로 천륜을 저버린 세조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사곡촌에는 집현전 직제학을 지내다가 단종이 양위하자 고향인 영천으로 낙향한 조상치도 잠시 머물렀다. 뒷날 사람들은 이곳에 김시습과 조상치 그리고 박씨 일가 일곱 명을 기리는 구은사(九隱祠)라는 사당을 세웠다.

 

한편 사곡촌에서 조상치가 단종의 최후 모습을 증언하였다. 1457621일 세조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로 유배 보냈다. 628일에 청령포에 도착한 단종은 조그만 집에 거처했다. 청령포는 3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험준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천혜의 유배지였다. 단종은 이곳에서 한() 서린 시 두 수를 지었다. 어가 처마 밑에 시가 결려 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의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단종은 청령포에서 두 달 정도 머물렀다. 그런데 여름에 큰 홍수가 났다. 단종은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 때 단종은 관풍헌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시를 읊으면서 시름을 달랬다. 매죽루는 세종 10(1428) 영월군수 신숙근에 의해 지어진 누각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자규사를 읊은 단종을 추모하여 누각 이름을 자규루로 불렀다.)

 

먼저 자규사(子規詞)이다.

 

달 밝은 밤 귀촉도 구슬피 우는데 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다락 머리에 기대었네 含愁情倚樓頭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고달프고 괴로운 사람에게 말하노니 寄語世上苦勞人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부디 오르지 마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귀촉도(歸蜀道)는 두견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하에게 쫓겨난 촉나라 임금 두우가 슬피 울며 죽어서 새가 되었단다. 그래서 그 새를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귀촉도라 불렀다. 그런데 귀촉도는 목구멍에서 피가 나도록 울어댔는데, 그 피가 떨어져 두견화(杜鵑花)가 되었단다. 이 두견화가 바로 진달래꽃이다. 사람들은 춘삼월에 진달래가 필 때 밖에 나가 꽃전을 부쳐 먹고 흥청하게 논다.

단종은 춘삼월에 부디 자규루에 오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처럼 서러운 신세가 생각나면 잔치가 망치니까.

 

단종은 외로웠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는 간혹 밤에 매죽루에 올라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했다. 그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 그러면서 자규시를 읊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을 나오니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단신 그림자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네.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수가 없고 假眠夜夜眠無假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窮恨年年恨不窮

 

새 울음소리 끊긴 새벽 산 위에는 지는 달이 희고 聲斷曉岑殘月白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 붉겠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먹어 저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天聾尙未聞哀訴

시름하는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단 말인가. 胡乃愁人耳獨聰

 

단종의 외로움이 진하게 배어나는 시이다. 16세 나이에 부인 송씨와 생이별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한스러웠다. 권력이 이렇게 무상한 것인가. 숙부 세조가 너무나 원망스러웠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