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내와 세계여행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4)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쓰다

[김세곤의 세계문화기행] 예술과 혁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44)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쓰다

승인 2020-06-08 14:53:0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도스토예프스키 형제는 1864년 1월에 '에포하'(세기)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3월에 첫 호가 나왔는데 그는 '지하생활자의 수기' 1부를 실었고, 4월엔 2부를 수록했다.

'시대'와 '세기' 잡지 표지. 사진=김세곤 제공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집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체르니셰프스키(1828~1889)가 1863년에 옥중에서 쓴 정치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반박이었다.

1828년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체르니셰프스키는 사라토프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1846년에 페테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포이에르 바흐의 유물론과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사라토프의 중학교 교사가 됐으나 2년 만에 학생들에게 불온사상을 전염시킨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쫓겨나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다.

1853년부터 그는 네크라소프가 편집을 맡고 있던 '동시대인'지에 기고를 시작했고, 1856년에는 동시대인의 편집 책임자가 되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비판하고 러시아 지성계에 혁명정신을 불어넣었다. 문학 · 정치 · 경제 · 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평론은 당시 러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러시아에서 농민혁명이 성공하는 날 사회주의가 승리를 거둘 것이며, 러시아 사회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농민공동체라고 생각했다. 1861년에 농노해방령이 공포됐을 때에도 그는 그 기만성을 갈파하고 토지분배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차르 정부는 그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1862년에 그를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에 감금했다. 옥중에서도 그의 활동은 증단되자 않았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해 자신의 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검열을 피해 은유와 완곡한 표현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그는 위대한 혁명가와 여성해방, 사회주의적 공동체, 혁명 후의 미래사회 등을 펼쳐 보였다. 이 작품은 이후 러시아 지성인과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레닌도 이 책을 수차례 숙독했다고 한다. (이무열 지음,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p 226-229)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단순명쾌하다. 딸을 부자 귀족에게 시집 보내 팔자를 고치려는 이기적인 부모의 강압에서 벗어나고자 의대생과 위장 결혼한 여주인공 베로치카는 노동자들의 자아실현은 물론 주주처럼 이익배당까지 하는 방직공장을 차린다. 사업에 성공한 그녀는 의사 남편에게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모범이 된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문학은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소설이 젊은이들에게 삶의 교본이 되길 바랬다.

실제로 이 소설은 당시 러시아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혁명가이자 문학평론가 플레하노프(1856~1918)는 “인쇄기 발명 이래 러시아에서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책은 없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성선설(性善說)을 지지했고 교육과 계몽을 중시했다. 계몽된 사람들은 이성적인 법칙에 의해 예측 가능하며 그러한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러시아 문학사뿐 아니라 정치사 · 철학사 등에서 족적을 남겼으며,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역할 모델을 제시함으로서 1860~1870년대 인민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강한 정치색을 띤 이 소설은 설교 위주였고 문학적 수준은 형편없어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투르게네프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속이 메스껍고 피부에 두드러기가 날 만큼 괴로웠다고 토로했는가 하면, 설교에 일가견이 있는 톨스토이 조차 체르니세프스키가 너무 노골적으로 훈계조라며 불평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에서 젊은 날 자신이 지녔던 공상적 사회주의의 신념을 보았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 이론의 허구성과 인간성 박탈을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두려움을 자각했다.

그는 '지하생활자의 수기' 를 통해 인간은 모순덩어리이고 비이성적 존재임을 드러내고 시베리아 유형 이후 이미 폐기해버린 공리적 사회주의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이덕형 지음,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폐테르부르크, p 253)

알렉산드르 2세(1818~1881, 재위 1855~1881). 사진=김세곤 제공



여행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저작권자 © 글로벌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