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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칼럼

사지 四知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4지 (四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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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04  09: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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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비밀은 없다. 뇌물은 은밀하게 주고받겠지만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요즘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성완종 리스트’가 바로 그 예이다.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살이를 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지방행정 지침서 <목민심서> 율기 6조의 ‘청심 淸心’조에서 이렇게 적었다.

뇌물은 누구나 비밀스럽게 주고받겠지만, 한 밤중에 주고받은 것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정약용은 그 사례로 양진(楊震 50?~124)의 '사지(四知)'를 들었다. 양진은 중국 후한(後漢 25년~220년)때의 학자이자 관료인데, 그는 경전에 해박하여 유생들이 그를 “관서(關西)의 공자(孔子)”라 불렀다.

양진은 나이 50세가 되어서 무재(茂才: 수재)로 추천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 동래태수(東萊太守)가 되었다. 그가 동래태수로 부임하던 도중 창읍(昌邑)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양진에게서 무재(茂才)로 천거를 받았던 창읍령(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왔다.

왕밀은 양진에게 비단 보따리 하나를 내놓았다. 양진이 왕밀에게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왕밀은 ‘그냥 받아두십시오. 지난번에 감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양진이 캐묻자, 왕밀은 “밤이라 아무도 알 자가 없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알거늘,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 [天知神知我知予知 何謂無知 천지신지아지여지 하위무지]”라고 하며 왕밀을 꾸짖었다.

비단 보따리에는 금(金) 10근이 들어 있었다. 양진은 보따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보따리를 내쳤으며, 왕밀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후세 사람들은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안다. (天知神知我知予知)’를 ‘사지 四知’라 불렀고 이를 공직윤리지침으로 삼았다.

한편 정약용은 율기 6조 ‘청심’조에서 아전과 수령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아전들은 늘 “이 일은 비밀이라 사람들이 아무도 모릅니다. 퍼뜨리면 저에게 해로울 뿐이오니 누가 감히 퍼뜨리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래서 수령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뇌물을 흔쾌히 받지만, 아전은 문을 나서자마자 마구 떠벌려 그 소문은 삽시간에 퍼진다. 그런데 수령은 그것도 모르고 있으니 참 슬픈 일이다.

한마디로 아전이 수령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1910년에 한일병탄때 자결한 선비 매천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조선의 3대 폐단으로 충청도 양반, 평안도 기생, 전라도 아전’이라고 하였을까.

수령과 아전의 관계를 요즘 버전으로 바꾸면 정경유착이고 입찰비리 · 납품비리이다. 어느 시대에나 이권을 얻고자 하는 이와 권력을 가진 이는 은밀하게 공생한다. 그리고 뇌물을 주고받을 때는 탄로나지 않을 것으로 굳게 믿는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다. 더구나 지금은 스마트폰 · 인터넷 시대이다.

 


< 참고 사항>

1) 양진 楊震(50 ? ~ 124)은 중국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으로 자는 백기(伯起)이다. 명신(名臣) 부친 양보(楊寶)에게서 《구양상서(歐陽尚書)》를 익히고, 태상(太常) 환욱(桓鬱)에게 배워서 경전에 해박하여 당시의 유생들이 그를 “관서(關西)의 공자(孔子), 양백기(楊伯起)”라고 불렀다.

나이 50세가 되어서 무재(茂才 : 수재)로 추천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 동래태수(東萊太守)가 되었다. 그 후에 태부(太仆), 태상(太常), 사도(司徒), 태위(太尉) 등을 역임했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4년(117) 태복(太僕)이 된 뒤 태상(太常)를 거쳐 연광(延光) 2년(123) 태위(太尉)에 올랐다. 당시 황제의 유모 왕성(王聖)이 환관 번풍(樊豊) 등과 탐욕을 부리며 교만과 사치를 저지르자 〈상소청출유모왕성(上疏請出乳母王聖)〉 글을 올려 강력하게 간언했는데, 번풍의 모함을 받아 면관(免官)되자 자살하였다.

그의 행적은 후한서(後漢書) 양진전 (楊震傳)에 나온다.

2) 후한(後漢, 25년~220년)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漢)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前漢)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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