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26일 아침 9시 30분경 하얼빈 역, 여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의사(義士) 안중근이 한국침략 원흉, 동양평화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이다. 절명한 이토가 마지막 한 말은 ‘빠가(바보)’였다.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 (대한제국 만세)’ 삼창을 외치고 순순히 잡혔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자신을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는 일본 검찰관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 의병군 참모총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나를 보통의 사형 피고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토씨 하나 안 틀리지 않고 피력하였다.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죄, 세 번째 을사조약과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열두 번째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 싶다고 거짓 선전한 죄, 열네 번째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다.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가 어찌 이토뿐일까? 비교적 온건주의자로 알려진 이토가 이 정도였으니, 일본 군국주의 강경론자들은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일본 메이지 천황도 청일전쟁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조선의 독립을 견고히 하기 위한 결단이라 하였고, 러일전쟁 때도 동양평화를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과 청·일 3국이 백인종인 서양세력의 침략에 맞서 공동으로 대응하여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조선과 중국의 식자층들은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하자 황인종이 멸종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이토의 동양평화론에 공감하며 일본을 적극 지원하였다. 안중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하자 정작 조선에 찾아온 것은 동양평화가 아니라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이었고 1907년의 고종 강제퇴위였다. 한편 1909년 7월6일에 일본각의는 한일병탄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여기에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병합을 단행하기로 하고 병탄을 위한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남한대토벌작전이다. 사실상 호남의병 대학살이었던 이 작전은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까지 이루어졌는데, 일본군 2개 연대 2,300명과 군함 10척이 동원되었고 전사한 호남의병이 420명, 체포나 자수한 자가 3천여 명이었다. 1910년 8월29일 한일 강제병합도 일본 메이지 천황은 동양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심지어 일본 언론은 ‘한일 병합은 조선인이 대일본제국이라는 세계 일등국의 국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이야 말로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렇게 ‘동양평화’는 겉과 속이 너무 다르다. 한국은 순진하게 일본이 ‘동양평화’를 지켜 줄 것으로 믿었고, 일본은 음흉하게 ‘동양평화’를 앞세우며 한반도의 식민지 야욕을 숨겼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성을 판 매춘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 교육장관과 여당의원이 국회에서 위안부의 강제성을 적시한 일본어 사전의 수정 필요성까지 거론했다. 일본어 사전에 위안부가 “일본군 병사의 성(性) 대상이 되기를 강요당한 여성”으로 설명된 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위안소에서 일본 장병의 성 상대가 되기를 거부할 자유와 이동 및 이직의 자유를 박탈당한 자’가 위안부라는 국제사회의 상식까지 무시한 망언이다. 2015년은 을사늑약 110주년이다. 지금 일본의 역사인식은 더욱 도를 넘고 있다.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궤변으로 정당화하려한다. 우리는 일본의 이런 역사왜곡에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부터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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