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퇴계, 고봉의 멘토가 되다.
세 번째 이야기 제3화 술을 다스리지 못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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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자주 고봉에게 술을 너무 마시는 병폐를 줄이라고 조언을 한다. 술을 다스리지 못하면 자신을 다스릴 수 없다는 충고이다.
퇴계는 1567.3.18.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공이 근래 자못 술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 하니,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과연 그런 병통이 있다면 덕으로 나아가고 삶을 보위하는 방도가 아닌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퇴계의 편지에 대하여 고봉은 1567.5.11.자 답서에서 소싯적부터 있던 병통이라고 고백한다.
술을 좋아하는 데 대한 경계는 감명되는 바 더욱 지극합니다. 저에게는 이 병통이 실로 소싯적부터 상당히 있었으므로 항상 괴롭게 여겼지만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만약 선생의 경계로 인하여 이 병통을 고치게 된다면 평생에 이보다 더 다행스러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위로가 됩니다.
한편 퇴계는 1570년 1월 그믐에 고봉의 술 마시는 병통에 대하여 따끔한 충고를 한다. 이 시기는 고봉이 영의정이준경의 미움을 사면서 광주로 낙향을 결심한 시기였다. 당시에 고봉은 너무 마음이 괴로워 술을 많이 마시고 다닌 듯하다. 이런 사정임에도 퇴계는 이미 1569년 3월초에 선조임금 앞에서 고봉을 명유 名儒로 추천까지 하였는데, 고봉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매몰찬 충고를 한다.
영전에 절하고 답하여 아뢰는 편지, 기 대사성 댁
(전략)
그대가 시골로 내려갈 뜻을 이미 굳히셨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는데, 지금 편지에 운운하신 말씀을 보고서 비로소 돌아가는 소매가 펄럭일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략)
세상에 드러나고 못하고는 운명에 달린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저렇게 하는 것 또한 운명입니다.(여기에서 저들이란 영의정 이준경등의 노당을 말함. 이 당시 기대승, 이이, 심의겸이 주도하는 신진 사림세력인 소당과 영의정 이준경, 좌의정 권철 등의 정권 주도세력인 노당이 1569.6.9. 대사헌 김개의 발언이후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영의정 이준경은 이황을 일컬어 산새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신진관료들이 흥분하였다. -필자 주) 그러나 이런 일에 부딪쳤을 때 또한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보고 사리를 좇아 뼈아픈 반성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일러 “상대에게 오만하고 사람들을 능멸하며 말을 삼가는 데 부족하고 몸을 단속하는 데 소홀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힘써 고쳐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해도 다시 한 번 분발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 듣건대 요즈음 다시 술을 굳게 다스리지 못하여 오래지 않아 큰 병이 나겠다고 하니, 그대가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런 평판을 얻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이제 고향으로 가시거든 온갖 잡념을 떨쳐 버리십시오. 문을 닫고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나서 학업을 익히고 다스리십시오. 깊이 생각하고 언행을 단속하십시오. 무릇 성현의 지극한 훈계인 충신(忠信)ㆍ독경(篤敬)ㆍ참전의형(參前倚衡)등을 모두 빈말로 보지 말고 반드시 내 몸에서 친히 보이게 하여 실제로 그것을 체화하기를 기약하십시오. (여기에서 ‘충신, 독경, 참전의형’은 말은 충실하고 믿음 있게 하고(충신), 행동은 돈독하고 공경스럽게 해야 하며(독경), 서있을 때 바로 앞에 같이 있는 듯, 수레를 탈 때는 책 끝 횡목에 기대고 있는 듯 그런 행실을 몸에서 떼지 말아야 한다 (참전의형)는 의미임)
그리하여 자신에게 돌아올 중책(重責)을 저버리지 마시길 간절히 빕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잘못 천거(薦擧)(1569.3.3. 퇴계가 선조에게 고봉을 유현으로 천거함 - 필자 주) 하였다고 다투어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천거하였다고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대에게 기대하는 바를 사람마다 다 같이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대가 평생 뛰어난 재주를 마구 써버리고 방탕한 슴관에 얽매여 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방자하게 노는 데 빠져서, 마침내 성현의 세계와 수만 리나 멀어지게 된다면, 이는 그대를 공격하는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사람을 알아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비록 잘못 천거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하여도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중궁(仲弓)에게 공경(敬)과 용서(恕)의 보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나라에 있어도 원망이 없고 집 안에 있어도 원망이 없다.”라고 하셨고, 주자(朱子)는 왕단명(汪端明)이 휴가 얻은 것을 기뻐하며 더욱 학문을 강론하고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그대도 깊이 생각하고 힘써 자신을 돌이킨다면 더 할 나위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끝으로 부디 자신의 몸을 지키고 아껴 진중(珍重)하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삼가 사례(謝禮)합니다.
융경(隆慶) 4년 1570년 정월 그믐, 황은 머리 숙입니다.
(후략)
이러한 퇴계의 따끔한 충고에 대하여 고봉은 1570.4.17.자 편지로 퇴계에게 답한다. 이 때 고봉은 광주에 낙향하여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면서 낙암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려 하였다. 고봉은 이 편지에서 퇴계에게 변명을 하고 술을 끊었다고 답한다.
선생께 답하여 올리는 편지, 판부사 댁
삼가 여쭙니다. 여름에 들어오면서 체후가 어떠하신지요? 앙모하는 마음 평소보다 갑절이나 더합니다. 저는 다행히 선생의 후한 권고(眷顧)를 입어 근근이 질병을 면하고 전원에 종적을 감추고서 무사히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쪽으로 돌아온 뒤로 멀리 선생을 생각하며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는데 서찰을 받으니 위로되고 감사한 마음 말로 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삼가 감사하는 글을 써서 서울로 보내어 선생께 전달되기를 바랐는데,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3월 16일에 계속해서 1월 그믐에 주신 글을 받아 가르쳐 주신 말씀을 자세히 받들고는 기쁘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여 감명됨이 실로 깊었습니다. 그러다 이달 초순에 또 이함형(李咸亨)이 전해 주는 자세히 책면(責勉)하신 선생의 편지를 거듭 받으니 더욱 감사하고 두려웠습니다.
전후에 깨우쳐 주신 말씀이 저의 병통에 맞는 약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제가 감히 깊이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실병(實病)을 제거하고 실효를 힘쓰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가한 이때를 당하여 위로 선생의 명계(明誡)를 따르고 아래로 예전에 익힌 학업을 다스린다면 거의 끝내 학문을 폐하지 않게 될 것이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니 선생께서는 다시 인도해 가르쳐 주시어 큰 은혜를 마무리해 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에게는 반드시 우러러 말씀드려야 할 회포가 있는데, 스스로 변명하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 또한 깊습니다. 그러나 끝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한두 가지 말씀 드리니, 바라건대 너그러이 살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상대에게 오만하고 사람들을 능멸한다는 데 대해서 저는 이런 마음이 없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상론(商論)하는 사이에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하여 사람들의 말을 자초하였으니 진실로 통렬히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편벽된 성품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삼가는 데 부족하고 몸을 검칙하는 데 소홀한 병통에 대해서는 제가 본래 알고 있는 바여서 항상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나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근본이 심후(深厚)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마다 번번이 드러나서 그렇게 되는 듯한데, 만약 근본에 공력을 더 쏟는다면 거의 조금은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술에 대한 일은 근래 병이 많으므로 인하여 끊었더니 몸을 기르고 덕을 기르는 데 모두 유익함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강력히 억제하여 다시 술에 빠지지 않고자 합니다마는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 천거하였다는 말은 저도 당초에 그렇게 생각하였으니 남들의 비난과 비웃음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는 다만 분수에 따라 힘을 써서 만분의 일이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광기조대(廣己造大)하여 곧장 담당하고자 하면 또한 〈보전(甫田)〉에서 기롱(譏弄)한 바와 같은 병통이 있을까 두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서울을 떠날 때 실로 결연(決然)하지 못함이 있었으니, 고인(古人)들이 처리한 바로 헤아려 보건대 누(累)가 없지 않은 것 같으므로 지난번 편지에 우러러 여쭈어 운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절하신 깨우침을 받으니 감사와 부끄러운 생각이 함께 일어납니다. 제가 비록 형편없지만 의리를 약간 아는 자이니 어찌 고인의 심사를 생각지 못하겠습니까. 울적하게 수심에 잠기는 것은 곧 열중자(熱中者)의 행위이니, 저는 스스로 이런 병은 면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방 안에 누워서 고루한 저의 학문을 익히고 뜻을 캐어 보니 자못 맛이 있어, 가난한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변변찮은 음식을 달게 여기는 것을 거의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산언덕에 작은 초암(草庵)을 신축(新築)하여 노닐며 지낼 곳으로 삼기로 하고, 낙(樂) 자를 그 초암의 이름으로 걸고자 합니다. 이는 대개 전번에 주신 글에 “가난을 마땅히 즐겁게 여겨야 한다.〔貧當可樂〕”는 말씀으로 인하여 제 마음에 소망하는 바를 부치려는 것입니다. 산이 비록 높지는 않으나 안계(眼界)가 두루 수백 리나 되므로 집이 완성되어 거처하게 되면 진실로 조용하게 수양하기에 합당한 곳이니, 그곳에서 종사(從事)한다면 정경(情境)이 조발(助發)하는 취흥(趣興)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 밖의 잡다한 일들이야 개의할 게 뭐 있다고 다시 운운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양찰(諒察)하시고 비평해 깨우쳐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듣건대 갈석(碣石)에 숨겨진 흠이 있어 장차 다시 다른 돌을 구하려 한다 하니, 멀리에 있는 저도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명문(銘文) 가운데 한두 곳을 개정(改訂)하라고 분부하신 뜻을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그 사이에는 힘을 들여 처리해야 할 곳이 있는데 마침 번잡한 인사로 인하여 즉시 생각을 다하지 못하였고, 또 요 며칠 동안 안질이 생겨 이 명문을 개수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감히 경솔히 개수하여 올릴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듣건대 가을이나 겨울에 명문을 돌에 새겨 넣는다 하니, 후일을 기다려 개수해 올리겠습니다. 살피시기 바랍니다.
서울에 있는 처자를 막 데려오려 하는데 작은 아이가 홍역을 앓고 있다 하니, 마음이 매우 심란합니다. 듣건대 서울의 풍색(風色)이 매우 좋지 못한 듯하니 결말이 어떻게 정해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자를 속히 궁벽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려 하나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형세이니 한탄스럽습니다. 가지가지 회포를 글로써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기거가 건승하고 성덕이 더욱 무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펴 아시기 바라면서 삼가 절하고 답장을 올립니다.
경오년(1570) 4월 17일 후학 대승은 배상합니다.
[주D-001]광기조대(廣己造大) : 나의 도덕을 넓혀 대위(大位)에 나아갈 마음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莊子 山木》
[주D-002]보전(甫田) : 예의도 없으면서 대공(大功)을 구하고, 덕을 닦지도 않으면서 제후(諸侯)가 되기를 구하는 제 양공(齊襄公)을 기롱한 시(詩)이다. 《詩經 齊風 甫田》
[주D-003]열중자(熱中者) : 임금을 사모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였으나 임금의 신임을 얻지 못하자 초조하여 몸이 다는 자로 곧 소인을 이른다. 《孟子 萬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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