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전라좌의병, 경상도에서 왜군을 무찌르다(3)
1592년 12월 중순에 성주성 전투를 홀로 치른 전라좌의병은 경상의병의 소극적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경상도를 떠날 결심을 한다. 이런 상황을 아는 듯 인동 선비 장봉한은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인동은 지금의 구미시 인동동으로 당시는 성주 근처의 인동현이었다. 이 글 역시 <난중잡록>에 기록돼 있다.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 한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오. 그 충성과 용맹이 관군과 견줄 바가 아니요 의기에 분발함이 다른 것과 비교할 바 아닙니다. 의로운 소리와 높은 절개가 늠름해 자신을 잊고 나아가 싸우는 것이 의이요 크고 작은 것과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병 앞에는 강한 적도 강함이 되지 못하고, 많은 적들도 많은 것이 되지 못합니다. 대저 우리나라의 많은 선비들은 태학관(太學館)에 올빼미가 날아다님을 분하게 여기고 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을 부끄럽게 여겨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군사를 모은 자가 곳곳마다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도 기운이 산하를 웅장하게 하고 충과 의가 모두 열렬해 정성이 금석을 꿰뚫은 것은 전라도가 제일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파천하시고 백관이 도망해 숨으며 빛나던 종묘사직이 이미 기장이 우거진 폐허가 됐는데도, 임금께서 다행히 여기시는 바는 전라도의 군사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피란하는 백성들이 도마 위의 고기와 솥 속의 물고기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유리(流離)하는 고생이 이미 극도에 달했는데도, 백성들이 믿는 바는 전라도가 그 지킴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의 희망이 모두 전라도에 있을 뿐 아니라 왜적이 두려워하는 바도 역시 호남 한 도 뿐이니,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실로 위급한 오늘날에 기대를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중략)
그런데 근일에 전도(前導)가 밤에 놀라 대군이 별처럼 흩어져 적을 잡을 기세를 놓쳤으니 이것이 어찌 장군만의 실책이리오. 실로 영남의 군사들이 미친 개 같은 왜놈들에게 겁을 내는 것이 벌써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므로, 왜적이 우리를 추격한다는 말을 잘못 전해 퇴군한 죄가 마침내 장군의 군사가 회군할 의사를 가지게 한 것입니다. 아! 백 번 싸워 백 번 패해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는 것만 같지 못하거늘 어찌 한 번 놀란 일로 떠나가고 머무는 것을 결정하리오. (중략)
지금 장군은 용맹하기가 범과 같고 곰과 같은 군사가 있으며, 하늘에 뻗치는 칼을 집고 해를 휘두르는 창을 잡고서 호남의 의사를 데리고 왔으니 그 이름이 장하지 않습니까. 왜란을 평정해 바른 데로 돌림이 이 한 걸음에 있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움을 유지하는 것도 이 한 걸음에 있으니, 그 맡은 것이 중하고 그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어찌 소장부(小丈夫)처럼, 싸워서 이기면 기세가 등등하고 싸워서 지면 군세가 움츠러들어 한 번의 승부에 진퇴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군문의 위엄이 사랑함보다 앞서고 군령이 엄숙해 오직 의를 따른다면, 방숙(方叔)의 계책이 장해 매우 치성하던 적세가 스스로 위축돼 날로 위축된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맹시사(孟施舍)의 용맹을 굽히거나 조괄(趙括)의 겁(怯)을 내 도끼가 이지러지지도 않았는데 오던 길로 수레를 속히 돌린다면 환영했던 백성이 어찌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또한 성상이 회복하실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일입니다.
장군이 이번에 떠나시는 것을 혹자는 국가의 불행이라 합니다. 애당초 사방에 두루 의론해 의기를 떨쳐 군사를 모집하던 실제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름과 그 실지가 현저히 다르니 혹자가 의병이라 말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나이다. 바라건대 장군은 다시 생각하소서. (중략)
이제 적의 굴혈에 와서 벤 머리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고 창과 칼을 거둬 넣으며 수렁에 빠진 이를 건지러 왔던 수레를 장차 돌리려 하니, 비록 젖 달라고 우는 어린애는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파천하신 전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중략)
그렇다면 중흥을 생각하는 형세는 다만 호남의 의사들을 믿는데, 군사가 주둔한 지 10일 만에 혈전(血戰)하는 정성을 바치지 아니하니 장차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지요. 영남의 군사는 흩어지고 도망한 중에 다시 불러 모았으니 흙 무너지듯 여러 번 물러감이 진실로 그런 형세이지마는, 장군의 군사는 강하고 날래며 용감함이 견줄 데 없는데 오히려 강한 기운이 꺾이어 군사를 되돌리겠다니 난감합니다.
부로(父老)들이 물어보면 장차 무슨 말로 답하시렵니까. 부로에게 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호남 의사들의 낙담이 장차 장군으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장군은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을 깊이 애통히 여겨 다시 근왕의 정성을 굳게 할 것이요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하지 마소서. 저는 무(武)로 적을 막을 재주가 모자라니 창을 메고 싸우는 노력도 감당할 수 없고, 문(文)으로도 적을 퇴각시킬 수 없으니 어찌 무의(無衣)의 시를 화답하겠습니까.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는 우뚝한 우리 장군이 반드시 최고의 공을 세워 개선하는 날에 문무(文武)의 덕을 칭송해 다시〈6월편을 노래하기를 원하나이다. 장군은 장한 기운을 더해 곤이(昆夷)의 주둥이를 무찔러 주소서. 도망해 숨어 다니는 중에 소리를 삼키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하소서.’
경상도를 떠나려 하는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을 붙잡으려는 인동선비의 호소는 너무나 리얼하다. 난중잡록은 남원 출신 의병장 조경남(趙慶男 1570년∼1641년)이 그의 나이 13세 때인 1582년부터 그가 별세하기 2년 전인 1639년까지 58년간의 일을 일기체로 쓴 사료이다. 특히 임진왜란 7년간의 기록은 중요한 사료로서 크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편 전라 좌우의병은 영남에 머물면서 성주, 개령의 적과 여러 번 싸워 몇몇 왜군을 베어 죽인 공은 있으나 한 번도 전승(全勝)한 적이 없어, 의병들의 피해가 너무 심했다. 따라서 전라도 의병들 중에는 경상도를 떠나 북으로 가서 근왕할 것을 거론하는 이가 상당수 있었다.
실제로 비변사도 선조 임금에게 곽재우, 최경회와 임계영의 의병을 근왕하게 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선조 25년(1592 년) 12월 9일
비변사가 곽재우·최경회·임계영의 의병을 근왕하게 하자고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각도의 의병 가운데 곽재우· 최경회· 임계영이 거느린 군사는 쓸 만해 보입니다. 이들 세 사람이 바야흐로 경상도에 있으니 급히 군사를 정돈해 근왕(勤王)하게 하소서.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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