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송흠, 86세의 나이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하다
1540년대 초반에 80세가 넘은 송흠은 관수정에서 말년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 있었다. 전라감사 송인수가 기영정 정자를 지어서 잔치도 가끔 베풀어 주기도 하여 그야말로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지냈다.
이런 일상 속에서도 그는 나라가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았다. 1544년 4월에 경남 통영의 사량진에서 왜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중국의 해적들도 당선 唐船을 앞세워 수시로 해안을 침범하여 도적질을 일삼았다.
나라의 국방이 걱정이었다. 송흠은 86세의 나이에 중종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한 때 송흠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보성군수 ․ 장흥부사 등 포구가 있는 지역의 수장을 하기도 하여 수군 방위 대책을 건의한 것이다.
그러면 먼저 상소문 전문을 읽어 보자. 이 글은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중종 39년(1544년) 9월 8일
중국과 일본을 경계하도록 청하는 판중추부사 송흠의 상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흠(宋欽)의 상소(上疏)를 정원에 내리고 이르기를,
“이 소를 보니, 그 멀리 염려한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늘 적을 깔보는 마음이 있다. 서북이나 남방에 변방의 말썽이 있으면 아랫사람의 생각이 다들 반드시 이기리라 여기고, 비변사와 변장(邊將)이 된 자의 경우도 다들 말을 쉽게 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없다. 갑작스런 기미를 살피고 늘 용병(用兵)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자가 있는지 내가 모르겠다. 바야흐로 왜노를 거절하는 때이고 서방에도 성식(聲息)이 있으니, 멀리 염려하는 자가 있으면 미리 조치해야 할 때이다. 당선(唐船)·왜선(倭船)이 와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거든 바다 가운데에서 만나더라도 도적의 배로 여겨 잡으라고 각도에 하유하라.”
하였다.
그 소는 다음과 같다.
“ 신 臣은 나이가 86세이므로 정신과 기력이 날로 쇠약해져서 세상에 뜻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해바라기의 정성이 남아있으므로, 차마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본디 한 가지뿐이 아니라 그 큰 요체는 안으로 다스리고 밖으로는 적을 물리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안으로 다스리는 도리는 조정에서 본디 이미 행하였으나, 밖으로 물리치는 계책에는 혹 죄다 거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신이 어리석은 생각을 아뢰겠습니다.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이므로 군정(軍政)이 해이하여, 변장이 된 자는 안일에 젖어 헛된 이름만이 있을 뿐,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고 방어하는 일에 대하여 태연하게 뜻을 기울이지 않으니, 혹 뜻밖의 경보가 있으면 어떻게 막겠습니까.
신은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 듣건대, 변장이 여러 번 중국 배한테 욕보았다 하니, 과연 신이 생각하던 바와 같습니다. 신이 들은 바와 평소에 생각한 바를 아뢰겠습니다.
저 중국 배라는 것은 표류하여 길을 잃었다고는 하나, 반드시 다들 도적질에 마음이 있는 자일 것입니다. 도적질에 마음이 없다면 어찌하여 화포(火砲)를 많이 갖추어 걸핏하면 사람을 상해하겠으며, 참으로 표류한 사람이라면 어찌하여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뜻이 없고 두렵게 하여 요동하는 말을 하겠습니다까.
또 듣건대 그 배는 단단하기가 여느 것과 달라서 사면에 다 널빤지로 집을 만들고 또 가운데가 넓어서 1백여 인을 포용할 만하며 그 밖의 기계(器械 : 병기) 도 정비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가는 데마다 대적할 자가 없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것과 달라서, 연변(沿邊)의 요해지(要害地)에 전함을 갖춘 것이 별로 없고, 공사(公私)의 배가 많이 있기는 하나 거의 다 좁고 사면이 다 허술하여 가려 막은 것이 없으며, 또 화포는 오래되고 화약의 힘은 효력이 없으므로, 저 중국 사람의 화포에 비하면 참으로 아이들 장난입니다. 그 밖의 기계도 다 잔폐(殘弊)하여 연마되지 않았으니, 적을 만나 반드시 지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기계가 엄밀하게 정비되면 사기(士氣)가 정명(精明)하다.’ 하였거니와, 우리나라의 기계가 이러하다면, 어떻게 사기를 떨칠 수 있겠습니까. 기계 가운데에서도 전함은 더욱이 중요한데, 탈 만한 전함이 없다면 양장(良將)· 정졸(精卒)이 있더라도 어떻게 적을 막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바닷가의 여러 고을에 그 조잔(凋殘)·풍성(豐盛)을 짐작하여 전함의 수를 나누어 정하여 감독해서 만들게 하되, 배를 만들 때에는 반드시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모두 당인 唐人의 배와 같이 해야 합니다. 전함이 갖추어지고 나면, 군졸이 다 믿는 것이 있어서 편안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화포·궁전(弓箭)·창검(槍劍) 따위 물건도 해마다 단련하고 달마다 단련한다면, 적선(敵船)을 만나더라도 우리가 어찌하여 저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른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기계만 있고 장수는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또한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얻는 것이 첫째이고 기계는 다음이니, 사람을 얻으면 기계는 절로 정비될 것이나,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기계가 있더라도 쓸 데 없는 물건이 될 것입니다.
신은 이제부터 병사(兵使)·수사(水使)와 연변의 수령(守令)·만호(萬戶) 등을 다 그 재덕(才德)이 장수가 될 만 한 자를 가려서 맡기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행해지므로 군졸이 명을 따라서 모두가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가리는 방도를 신 臣이 또한 생각하였습니다. 대신과 여러 대부(大夫)가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마땅한 사람을 천거하면 상주고, 마땅한 사람이 못되면 벌주되, 이를 법령으로 만들어 이 법령을 사시의 질서가 틀림없이 시행한다면, 잘못 천거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사람을 얻는 것이 첫째라 한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진(各鎭)· 각포(各浦)의 군졸이 정예하지 않은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배를 타면 두려워서 활을 잡지 못하는 자가 10명 중에 8∼9명이고, 이따금 잘 쏘는 자가 있어도 가난하여 궁시(弓矢)를 갖추지 못하여 빈손으로 번(番)을 서는 자가 있고, 진장(鎭將)의 뜻을 맞추어 짐짓 번 들지 않고서 그 값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군졸이 정예하지 않은 것이 온통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에 변장이 된 자는 적선(敵船)이 왔다는 말을 갑자기 들으면 계책이 나올 수 없고, 한량(閑良)의 무리를 죄다 찾아내어 조방(助防)하게 하면 그 무리도 군려(軍旅)에 익숙하지 않고 배를 부리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아, 변장이 적을 만났을 때에도 다 두려워하여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 쏘는 자가 없으니, 군졸이 정예하지 않은 것을 여기에서 알 만합니다.
그러므로 장수를 가리는 것이 첫째이고 군졸을 뽑는 것은 또 그 다음인데 군졸을 뽑으려면 장수된 자가 마땅히 군사들이 몸이 씩씩한지 활을 잘 쏘는지를 보아 선택하여 서로 혼동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잘 쏘는 자는 군사와 한량뿐이 아니라 공천(公賤)·사천(私賤)과 한잡(閑雜)한 사람 가운데에도 많이 있으니, 지방의 수령이 사정을 쓰지 않고 정밀하게 가려서 치부하여 잡역(雜役)을 면하게 하면, 갑작스러운 때의 쓰임에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아뢴 것은 오로지 당선 唐船을 대비하기 위한 것 때문에 발론한 것이 아니라, 변방의 일에 대비하는 것을 널리 논한 것인데, 변방의 일에 대비하는 계책은 표류한 배에 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라를 위하여 멀리 생각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신에게는 또 한 가지 염려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변장은 적선 하나를 만나도 낭패하여 감히 대항하지 못하니, 만일 왜적이 자기 나라의 배를 몽땅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침략해 온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감당해 내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나라에서 대마도(對馬島)의 왜인을 접대하지 않고 화친을 아주 끊었다 하니, 저 왜인에게 원망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이런 염려를 합니다.
행여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늙은 자의 말이라 여기지 않고 시험하신다면, 밖으로 적을 물리치는 방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상소문을 읽어 보니, 86세의 나이 즉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나이에 나라의 국방을 위하여 자기의 경륜을 이야기하는 지극 정성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한편으로는 중종 임금이 그 상소를 일일이 읽어보고 관련부처에 지시하는 자상함 또한 울림을 준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필자도 이제 퇴직 공무원이지만, 나이가 70이 넘은 퇴직 공무원이 이런 유형의 정책 건의를 할 수 있을 지, 그리고 대통령이 이런 건의를 읽고 관련부서에 검토하라고 지시 할지에 의구심이 생긴다. 어쩌면 500여 년 전의 조선은 임금과 신하 간에 소통이 잘 되는 나라였으리라.
( 2011.7.28 작성)
제25회 송흠, 수군 개혁론을 건의하다.
송흠이 올린 상소의 핵심은 중국의 해적과 왜군의 침범에 대처하기 위하여 수군의 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건의이다. 그는 먼저 나라가 개국 이래 150여 년 동안 태평하여 군정(軍政)이 해이하여졌고, 변장이 된 자는 안일에 젖어 있음을 비판하고 변장들이 여러 번 중국 배한테 욕보았어도 속수무책임을 한탄하면서 왜구의 침략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리하여 송흠은 수군개혁론을 펴는 데 첫째 중국의 당선 唐船처럼 판옥선을 제조할 것, 둘째 무기와 화포 등을 개량할 것, 셋째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수군을 정예화 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면 송흠이 상소한 시기인 1544년 조선의 해상 방위 상황을 살펴보자. 이 시기는 중국의 해적들이 수시로 해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더 큰 사건은 1544년(중종39년) 4월에 사량진 왜변 蛇梁鎭倭變이 일어난 것이다. 왜구는 20여 척의 왜선으로 경상도 통영의 사량진을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왜적이 성을 포위하고, 수군 1명을 죽이고 10여 명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1510년에 일어난 삼포왜란과는 아주 다르지만 대 일본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였다. 이 왜변으로 인해 일본과의 외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고 당시 조정은 일본과 절교를 하고 있는 상태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를 살펴보자. 조선은 1392년 건국 직후부터 명나라와는 사대외교를 펴왔으나 일본에 대하여는 강경과 유화 정책을 번갈가면서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였다. 고려 말 부터 왜구는 조선의 포구를 수시로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태조 이성계도 1380년에 전라도 지리산 근처 운봉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쳤고, 이런 공적 등으로 조선을 세우는데 전라도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조선 초에도 왜구의 침범이 근절되지 않자 마침내 세종1년(1419년)에 세종임금은 이종무에게 대마도 정벌을 하도록 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후 조선은 1426년부터 부산포(동래), 제포(웅천) 염포(울산)등 삼포를 개항하여 일본의 왕래와 교역을 허용하였다. 이어서 1443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서 도항중인 대마도주에게 모든 도항자를 규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줌으로서 체계적인 통제와 함께 비교적 유연한 허용이 이루어졌다.
삼포의 개항으로 왜구의 침입은 크게 감소되었지만 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크게 증가하여 조선 정부로서는 이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였다. 중종 시절에 들어와서 왜인에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왜인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삼포왜란 三浦倭亂을 일으켰다. 1510년 4월, 제포에 거주하고 있는 왜인들이 대마도주의 아들 소(宗盛弘)를 대장으로 삼아 4,000∼5,000명의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하여 첨사 이우증을 살해하였다. 또, 제포를 공격 첨사 김세균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절도사(前節度使) 황형(黃衡)과 전방어사(前防禦使) 유담년(柳聃年)을 각각 경상좌 ·우도방어사로 삼아 삼포로 보내어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마도주의 아들 소는 피살되고 삼포 거류의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주하여 난은 평정되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삼포는 폐쇄되어 통교가 끊기었다. 그리고 이 상태는 1512년 임신약조가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임신약조 이후 왜구의 침략은 한때 잠잠하였으나 다시 1522년과 1523년에는 전라도와 황해도에 침범을 하는등 간헐적인 침범이 있었다. 그리고 1544년에 사량진왜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면 왜군들의 침범에 대한 조선 수군은 방위체계는 어떠하였을까. 먼저 조선의 군선을 알아보자. 조선 초기의 군선은 맹선 猛船이었다. 맹선은 평시에는 조운(漕運)선으로, 전시에는 군선으로 이용되는 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선(大船)·중대선(中大船)·중선(中船)·쾌선(快船)·맹선(孟船)·별선(別船)·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 추왜별선(追倭別船) 등 여러 종류의 군선들이 증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군선이 일정한 규격 없이 건조되어 군선으로서 쓸모가 없었으므로 1461년(세조 7) 10월 신숙주(申叔舟)가 각지의 군선을 개량하여 군용과 조운에 겸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1465년에 병조선(兵漕船)이 개발된 것이 맹선의 전신이 되었다.
병조선은 세조대에 개발되어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하여 대 · 중· 소 맹선으로 개명되어 그 뒤 1세기 동안 조운과 전공(戰攻)에 겸하여 사용되었다. 왜구가 완전 진압된 평화 시에는 군선은 조운을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 보면 맹선에 대한 제반 규제는 수군(水軍)의 군비감축이라는 뚜렷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세종실록≫ 지리지와 ≪경국대전≫의 군선 및 선군(船軍)의 수를 비교해 보면, 군선이 829척에서 739척으로 줄었고, 선군이 5만 177인에서 4만 8800인으로 감축되었다. 더욱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조선 829척 중 무군선(無軍船)이 57척뿐인데 ≪경국대전≫에는 737척의 군선 중 249척의 무군선이 기록되어 있어 세조 때 오히려 군용선척의 감축이 있고 조운의 사용이 많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맹선은 군선으로서는 너무 둔중하여 쓸모가 없다는 논란이 성종 때에 거론되었고, 중종때에 계속적으로 발생한 삼포왜란 · 사량진 왜변을 진압하면서 맹선은 군선으로서의 역할에 대하여 논란이 일어났다.
실제 전투에 배치된 맹선들은 해상에서 왜구를 만나면 속도가 느리고 기동이 둔하여 맹선에 비하여 선체가 작고 날렵한 왜구의 배를 따라잡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 수군들은 왜구의 배를 나포하기 위해 왜군선과 크기가 유사한 ‘비거도선’이라는 소형 경쾌선을 임기응변적 군선으로 활용하였다. ‘비거도선’이란 당시 어로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소형 선박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군선이 소형 경쾌선으로 선형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1510년에 삼포왜란이 발생했다. 그런데 중종 5년에 삼포왜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소형 경쾌선으로의 선형변화가 해양방위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소형선이 비록 속력이 빨라 왜선을 추격할 수는 있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부적합했습니다. 그것은 군졸과 병기를 많이 승선시키지 못하여, 적선을 추적했으나 적들이 칼을 들고 돌격해 오면 용감한 우리 병사라도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제 대선으로 대처하면 선체가 높아 적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보고 화포를 쏘면 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10년 삼포왜란 이후 소형 경쾌선이 해전에 부적합하다고 지적된 것은 군졸과 무기를 충분히 적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형 경쾌선으로 왜구의 배를 추격했지만 백병전에 능한 왜구들이 쉽게 우리 군선으로 돌격하여 오히려 역으로 제압당했다는 것이다. 또한 삼포왜란은 대규모 왜인들의 침탈 행위로서 종전 소규모의 왜구 침탈과는 그 성격이 다른 준 準 국제전이었다. 전쟁에 준한 대규모의 침략에서는 소형 경쾌선이 조선수군의 군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는 어렵다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제기한 사람이 서후이고 송흠이다. 서후는 1521년에 경쾌속선의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대함을 만들 것을 건의한다. 그는 군기(軍器)에 큰 관심을 나타내어 100근이나 되는 강노(强弩 : 여러 개의 화살을 연달아 쏠 수 있도록 만든 큰 활)를 만들어 중종에게 바치기도 하였고 120근의 궁노(弓弩 : 큰 활)를 제작하기도 하는 등 국방의 필요성을 강조한 대신이다.
중종 16년 신사(1521,정덕 16) 5월7일 (무오)
조강에 나아가다. 참찬관 서후가 역승의 일과 전함에 관한 일로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서후(徐厚)가 아뢰기를, “신이 선위사(宣慰使)로 경상도(慶尙道)에 왕래하였는데, 각역(各驛)의 역자(驛子)가 찰방(察訪)을 편하다 하고 역승(驛丞)은 불편하다 하여 다투어 하소하였습니다. 대저 찰방은 사류(士類)의 사람들이요 또 천전(遷轉)하는 길이 있으므로 반드시 근신(謹愼)할 이유가 있지만, 역승은 앞길이 여기에 그치고 다시 통할 길이 없으므로 침탈함이 한정이 없어 역졸(驛卒)을 도산(逃散)하게 만듭니다. 도로 찰방을 두어서 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 역로(驛路)의 소생을 기약할 수 있겠습니다. 또 남방(南方)의 전함(戰艦)은 옛날부터 두어 오는 것인데, 지금은 대맹선(大猛船)을 쓸데없다 하여 다 버리고 소선(小船)만 쓰고 있습니다. 소선이 다른 배를 쫓기에는 빠르지만 육박하여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며, 또 전사(戰士)를 많이 태우지 못하고 적군이 기어오르기도 쉽습니다. 만일 한 적(賊)이 칼을 빼어들고 돌입하면 맹사(猛士)가 많더라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대함(大艦)은 높고 가팔라서 기어오르기는 어렵게 되었고 내려다보며 제어(制御)하기에는 편리합니다. 이것이 모두 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함에 관한 일은 병조에 묻겠거니와 역승의 일은 전에 이미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게 하였다. 대저 역승은 원래 찰방만 못한 것이다. 그러나 《대전(大典)》의 법을 경솔하게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1544년에 송흠도 전선개혁안을 낸다. 이 안은 판옥선 출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보다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저 당선 唐船이라고 하는 것은 사면이 판으로 옥을 만들었고, 그 안이 넓어서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고, 항해와 전투에 필요한 기구와 무기를 싣지 않은 것이 없으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적이 없어 해전을 하면 모두 승리합니다. 우리나라 군선은 이것과 달리 연변(沿邊)의 요해지(要害地)에 전함을 갖춘 것이 별로 없고, 비록 공선과 사선이 많이 있다고는 하지만 선체가 협소하고 사면이 트여서 적의 공격을 막아줄 방패막이가 없습니다. 또 화포는 오래되고 화약의 힘은 효력이 없으므로, 저 중국 사람의 화포에 비하면 참으로 아이들 장난입니다. 그 밖의 기계도 다 잔폐(殘弊)하여 연마되지 않았으니, 적을 만나 반드시 지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 따라서 군선을 당선과 같이 판옥선으로 만들도록 하십시오."
송흠은 군선이 갖추어야 할 요소 중의 하나인 인원과 무기를 충분히 적재하면서, 전투 시 아군의 피해를 감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즉 당선 唐船이라고 지칭되는 명나라의 군선처럼 우리도 판옥선을 만들어 해양방위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2011.7.29 금 작성 )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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