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의 보길도 예찬입니다. 남도는 그야말로 찬사 일색입니다. 그런데 남도 사람들이 그 진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23] 보길도 부용동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때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왕을 돕기 위해 수백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으나 도중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세상 볼 면목이 없다며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윤선도는 섬 하나에 들렀는데 그 풍광에 반하여 여기에 은신처를 잡게 되었으니 그곳이 보길도다.
격자봉(格紫峯·425m)에 올라 지세를 살핀 윤선도는 마치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는 산 아래에 살림집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건너편엔 독서처로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지었다. 그리고 동네 아래쪽에 계곡물을 판석[굴뚝다리]으로 막아 연못[洗然池]을 만들고 그 연못 물을 끌어들여 네모난 인공연못[回水澤]을 만든 다음, 그 사이에 섬을 축조하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못 가운데에는 일곱개의 육중한 자연석을 호쾌하게 포치하여 장대한 공간감을 연출하고, 동서 양쪽의 큼직한 너럭바위를 대(臺)로 삼아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맞추어 악공은 피리불고 무희는 춤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윤선도는 13년간 부용동을 가꾸어 당시엔 건물이 모두 25채였다고 한다.
혹자는 부용동을 보면서 윤선도의 호사 취미를 빈정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해남 윤씨의 막대한 재력과 윤선도의 안목이 이런 조선의 명원(名苑)을 남겨준 것인데, 과연 우리 시대엔 어느 집안 어느 누가 300년 뒤 국가 사적이 될 수 있는 정원을 남긴 것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보길도 부용동은 동백꽃 만발하는 3월이 제격이라고 하지만 지금쯤이면 인공 섬의 배롱나무가 마지막 꽃대를 피우는 모습도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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