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 나세찬 ,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다.
- 나주 송재사”
내 온갖 꽃의 시들어짐을 남모르게 슬퍼하며
조화의 덧없음을 괴로워한다네.
저 분분한 상수리나무는 오래도록 살아가고
오수나무들이 또한 송죽을 어지럽히려 하네.
세한의 절개를 옛말에서 들었으니
군자의 아름다운 기절에 의지하여 함은
어디서 찾을손가 산모퉁이의 휘휘한 곳에서
앙상히 말라서 홀로 서 있음을 놀라와 함이로다.
(중략)
아, 천지간에 분수를 지킴이 제일이니
영화롭고 쇠잔함도 모두 분수 밖의 일이로다.
궁한들 무엇이 슬프며
영달한 듯 어찌 기뻐만 하랴.
잣나무는 병으로 여기지 않으나
내 홀로 너를 슬퍼하노라.
잣나무여, 잣나무여
만물 가운데 어찌 홀로 이와 같은가.
살고 죽는 일 비록 자신에게 있다고 하나
내 누구를 믿으리오, 오 천지의 신명이시어.
1522년 어느 날 , 25세의 한 청년이 부친 시묘살이를 마치고 장문의 부 賦를 짓는다. 부친은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하다가 영월로 귀양을 간 후 한 많은 세상과 이별을 한다. 3년간 시묘살이를 한 그는 잣나무의 병들음을 슬퍼하는 부, 이름 하여 애병백부 哀病柏賦를 짓는다.
잣나무는 <논어>에 나오는 나무이다. 논어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말이 있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다. 그 절개와 지조는 곧 선비의 덕목중 하나이다. 그런데 잣나무가 병들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랴. 1519년 기묘사화 , 1521년 신사무옥으로 이어지는 사화로 선비들은 실의에 빠지었다. 기를 펴야 할 사림들이 위축되었고 훈구파들의 무모함과 행패가 만연하였다.
송재 나세찬(1498-1551)은 이런 세태를 탄식하고 좌절한 사림들을 병든 잣나무에 비유하여 사회시를 쓴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지금은 잣나무가 비록 병들었지만 그 병이 곧 나아서 다시 푸르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세상을 바르게 하고자 출사한다. 1528년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사관이 된다. 임금을 곁에 모시면서 의로운 나라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고심한다.
1534년 10월 중종은 정시 庭試에서 예양 禮讓을 높이고 풍속을 아 름답게 하는 방안을 책문 策問으로 냈다. 나세찬은 이 책문에 답한다. 그는 예禮의 용用은 조화에 있다고 보아 화 和 글자를 책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조정이 길을 함께 하는 자끼리 붕당朋黨을 만들어 배척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나라가 어떻게 잘 다스려질지 걱정을 한다. 전하께서 만약 바르지 못한 자의 말에 속는다면 조정이 불화하고 공정한 도는 싸락눈처럼 흩어지고 사사로운 도는 구름처럼 일어날 것이라며 붕당을 우려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한직에서 원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 뒷날 분란의 불씨가 된다고 하였다.
이 책문에 대하여 당시 시험관인 김안로 (1481-1537)가 문제를 삼았다. 그를 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김안로는 그의 아들 김희가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하자 권력을 농단하였다. 그는 훗날 인종이 되는 동궁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켰으며 정광필, 이언적을 귀양 보내고 , 중종 후궁인 경빈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을 죽음으로 몰기도 하였다.
중종임금은 처음에는 신하가 책문에 쓴 글을 가지고 문제를 삼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김안로 일파가 거듭 죄줄 것을 아뢰자 그리하라고 한다. 나세찬은 1534년 11월부터 12월까지 40여 일 동안에 여섯 번이나 형신을 당하여 다리가 깨지고 뼈가 부서진다.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심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어버이의 유체를 버릴 수 없다하여 그 뼈를 주워 주머니에 담으면서 옷을 찢어 임금에게 혈소 血疏를 올렸다. 측은히 여긴 중종이 특별히 용서하여 죽음만은 면하여 주었다. 그리고 강원도 고성에 유배를 보낸다.
그가 옥에서 나오는 날, 들것에 실려 나오면서 시 한 구를 읊었다. ‘사십일 옥중생활이요. 삼천리 귀양길이로다.’ 부축하던 고향 사람이 그 시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였는데,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 그를 원망이 없는 군자’라고 하였다.
유배지에는 먹을 것이 모자라서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으나 그는 염려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성현의 책을 읽었다. 임금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가 살아가는 것을 알아보게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 임금에게 ‘수중에 중용, 근사록 같은 책들을 놓지 않고 좌우에 충신 忠信 두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공부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유배 중에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정진한 것이다.
한편 당시에 기세등등한 김안로는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까지 몰아내려 하다가 중종의 미움을 샀다. 1537년 10월에 그는 사약을 받았다. 김안로가 죽자 나세찬은 즉시 복직되었다.
1537년 10월 27일의 조선왕조실록을 보자. 이 날은 김안로가 사약을 받고 죽은 직후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 나세찬의 대책은 오늘날 보면 실로 정론(正論)이다. 그런데 그때 김안로가 시관(試官)으로서 어전(御前)에서 과차(科次)를 정하였다. 김안로가 그 글을 보고는 ‘논의가 바르지 않다.’ 하여 그것으로 논죄하였다.”
1538년에 나세찬은 봉교로 다음해에는 탁영시에 장원 급제하여 부수찬으로 임명되었고 1541년에는 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 금호 임형수, 미암 유희춘과 같이 호당에서 글을 읽었다.
1545년에 그는 대사간이 되었는데 그때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섭정이 시작되고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 일파를 제거한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을사사화로 피화를 입은 백인걸, 유희춘 , 정황을 구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곧바로 해직이 되었다. 윤원형 일파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는 1546년에 대사헌이 되어서도 이들을 구하려다가 결국 벼슬에서 물러난다.
그나마 큰 화를 입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화를 입지 않은 것은 “이 사람은 국가의 큰일을 담당할 사람이다.”라는 중종의 말씀을 받든 문정왕후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 뒤 그는 좌천되어 한성우윤, 한성좌윤이 된 후에 문소전에 인종을 모시어야 한다고 간언하다가 전부부윤으로 밀려나서 155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소세양, 임억령, 김인후등이 만사를 지었다.
김인후의 만시를 보자.
나는 나부자 어른을 사모 했으니
아름다운 덕과 행실 갖춘 인물이었네.
나주에선 뛰어난 재주꾼으로 칭송되었고
호당에선 훌륭한 유풍 남겼도다.
정의는 공훈을 논하는 곳에 나타나 있고
마음은 책문을 드릴 때에 담아 두었구나.
내 평생 부끄러워 무안해 하였더니
이 부음을 듣고 더욱 눈물 적신다.
나주시 문평면 서원마을에 있는 송재사에는 그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여기에는 호당에서 같이 공부한 금호 임형수의 신위도 같이 있다. 송재 나세찬. 그는 절의를 숭상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이다. 바른 말을 하고 세상을 의롭게 하고자 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를 재조명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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