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 | 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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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요새, 호산장성
2006년 11월20일 이른 아침, 1780년 6월24일에 평안도 구룡정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연암과 구련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열하일기’에 조선의 출발지점은 소상하게 나와 있지만, 중국 측 상륙지점은 모호하다. 나는 이른 아침 택시를 탔다. 숙소에서 출발해 30분 남짓 달리니 의주 건너편, 최근 보수공사를 마친 호산장성(虎山長城)에 닿았다. 단둥(丹東) 동북쪽 20km, 해발 146m로 우리나라 진안 마이산과 비슷한 산이다. 중국은 명나라 성화 5년(1469)에 축조한 성이라면서 애써 그 연혁을 늘려 얘기하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만리장성의 기점을 산하이관으로부터 단둥까지 최소 1000km 연장 발표했고, 장성을 보수·증축한 것은 불과 2~3년 전 일이다. 물론 ‘열하일기’에는 호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파른 비탈을 쏜살같이 올랐다. 거기 정상에 오르면 연암이 출발했던 내 나라 의주땅 통군정이 보인다기에. 베이징의 만리장성에서 보아 눈에 익은 성문, 성로, 성각, 적루를 따라 반 시간쯤 올랐을 때 나는 마치 이동 카메라인 양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 아래 압록강을 건너 있는 높은 병풍자락이 의주인 듯 가물가물 통군정 처마가 희끗거렸다. 그 아래로 가파른 언덕, 다시 언덕 아래 나루터가 있겠지. 그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연암이 거기서 의주부윤(府尹)의 출국 검사와 환송 인사를 받으며 나룻배를 기다렸겠지. 호산장성과 의주 산자락 사이에는 잔잔한 파도처럼 샛강이 줄 지어 있었다. 바로 내 코앞에 있는 것은 우적도(于赤島), 그 서쪽으로 다지도(多智島), 그리고 위화도(威化島). 여기서 굽어보는 지형으로 보면 연암 일행이 잠시 기착했던 섬은 우적도나 다지도가 아닐까? ‘열하일기’의 기록대로라면 도강한 뒤 10리를 더 가서 삼강(三江·오늘의 아이허(愛河))을 만났다니까. 조망은 일품이다. 동쪽으로는 의주의 통군정, 남쪽으로는 가깝게 압록강과 아이허의 합수점, 멀리 위화도를 넘어 단둥의 압록강 철교와 단교…. 그러니까 압록강과 아이허가 이루는 모서리에 솟은지라 한눈에 두 나라의 산천을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예나 지금이나 까다로운 출국심사 나는 이 좋은 전망대에서 건너편 의주를 바라보면서 지금쯤 나루터에서 서성이고 있을 연암을 상상했다. ‘자줏빛 몸통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그리고 쫑긋한 두 귀’의 애마를 몰고 서 있을 사람. 그는 그 말이 1만리를 달릴 명마라고 했다. 문득 분통이 터졌다. 도대체 관청과 관리는 왜 생겨나서 모처럼 출국하는 선비나 아전들을 그토록 못살게 잡아두고 있는지, 예나 지금이나.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출국 검사는 쥐 잡듯했다. 우선 출국 신고가 철저했다. 사람은 성명, 주소, 연령은 물론 신장과 수염이나 흉터가 있는지도 적어야 했다. 말의 털빛도 적어야 했다. 특히 금물(禁物) 검사가 까다로웠다. 황금, 진주, 인삼, 초피와 외환 허용치 외의 불법 은화들이 그 대상이다. 신분에 따라 검사 방식이 달랐다. 하인은 옷을 벗겨 사타구니까지 만져보고, 무관이나 통역관은 행장을 풀어헤치게 했다. 그러니 이불 보따리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 상자들이 낭자하게 뒹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깃발을 세 개 세워놓고 통관의 문을 삼았는데 첫 번째 깃발에 걸린 사람에겐 곤장을 치고 물건까지 몰수했고, 두 번째 깃발에 걸리면 귀양을 보냈다. 세 번째 깃발에 걸리면 목을 베어 뭇 사람에게 보이게 했다. 정나미 떨어지도록 혹독하게 조국을 떠나온 연암은 겨우 압록강을 절반쯤 건넌 어느 샛강에서 의주 쪽을 뒤돌아보며 “거기 한 조각의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거기를 비추는 햇살이 한 점의 샛별처럼 보인다”며 그리워했다. 연암은 조국을 그렇게 미워했고, 또 그렇게 사랑했다. 나는 서둘러 하산했다. 다시 단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동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학창시절 공부했던 수풍댐이 멀지 않다지만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7~8km쯤 왔을 때 길가에서 ‘九連城’이란 표석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연암의 상륙지점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가 중국에서 최초의 밤을 보낸 곳은 분명 구련성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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