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40)
- 안지 · 성임 · 이문형 · 이승소의 압구정시(狎鷗亭詩)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안지 · 성임 · 이문형 · 이승소 등도 압구정(押鷗亭) 시를 지어 한명회를 칭송했다. (한국 고전번역원 사이트, 한국고전 종합 DB,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도 광주목 편에 수록됨)
먼저 안지(安止 1384∽1464)의 시이다.
한공의 아담한 취미, 청한(淸閑)한 것을 사랑하여,
매양 강 정자를 향하여 갔다 왔다하기 좋아하네.
다만 고기 낚는 늙은이의 눈 같은 귀밑털을 드리운 것과 짝하는데,
즐겨 노래하는 기생들 구름 머리채를 어여삐 여기랴.
갈매기는 섬돌 밑 맑은 물에 길들었고,
소라[螺]같이 물가에는 점점(點點)한 산이 벌려 섰네.
사직(社稷)의 특별한 공을 어찌 말하랴.
뜻대로 푸른 물굽이 굽어봄이 무방하리라.
권력욕과 재물욕으로 똘똘 뭉친 한명회를 청한(淸閑)한 것을 좋아하는 선비로 칭송하다니. 아부치고는 너무나 지나치다.
안지는 이조참판, 공조판서,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했다. 1445년(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다음은 성임(成任 1421∽1484)의 시이다.
해를 하늘에 받들어 팔도(八道)에 비치니,
공명은 드높이 기린각에 올랐네.
묘당(廟堂)에선 이미 경륜의 손을 펴고는
도리어 갈매기를 짝하여 물가에서 희롱하네.
벼슬하는 틈에 조용히 대궐에서 물러나와
신세를 물가에 붙였네.
옆 사람들이 부질없이 고기잡이와 나무꾼으로 보고,
당시 조정에 제일류(第一流)를 몰라 보네.
어부와 나무꾼이 한명회를 몰라주는 것을 한탄하는 시를 쓰다니. 원래 갈매기와 친한 삶이란 부귀공명 다 버리고 소박하고 겸허하게 사는 모습 아니었던가.
성임은 글씨와 시문이 뛰어났는데 특히 율시를 잘 지었다.
이어서 이문형(李文炯 ?∽1466)의 시를 읽어보자.
빛나는 정자 높이 한강 물가에 임하니,
성남(城南) 지척 사이에 홍진(紅塵)이 막혔구나.
목란주(木蘭舟)를 달밤에 띄우니 연기는 개울에 비끼고,
버드나무 술집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비는 나루터에 어둡네.
들 밖의 산 빛은 창[戟]을 벌여 놓은 듯,
난간 앞 물결 그림자는 사람을 흔드네.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대업을 역사에 전해 두고,
창주(滄洲)에 돌아와 흰 갈매기와 친하네.”
이문형은 1460년에 시를 잘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승지로 발탁되었고, 예문관 직제학 때는《손자주해》를, 우부승지 때는《역대병요》를 교정하였다.
끝으로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시이다.
압구정은 산 그윽한 곳에 있는데,
아래 맑은 강이 있어 만고에 흐르더라.
상공(相公 한명회)이 여가에 와서 거닐어,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나.
공명을 세상에 덮었으나 유후(留侯)를 봉함에 족하고,
부귀는 우연히 굴러 들어온 것이매 뜬구름과 같네.
몸이 한가하여 빈 배를 띄웠는가 의심하고,
기심(機心 간교한 마음)을 잊었으니 강변의 갈매기와 친할 만하구나.
흰 갈매기 날아와 물가에서 희롱하니,
날개를 비비고 그림자 희롱하며 울어 서로 화답하네.
가끔 놀라 일어나 강가를 지나니,
맞은 언덕 바람이 창랑(滄浪) 노래 보내네.
상공이 난간에 의지하여 흥을 걷잡지 못하니,
건곤 만리가 두 눈에 드는구나.
물에서 헤엄치고 구름 속에 나는 것이 각각 자유로우니,
강 위에 모든 물건이 시름없구나.
바람과 비는 때맞추어 순조로우니,
남촌과 북촌에는 뽕과 삼이 풍년일세.
공(公)이 능히 이같은 태평한 아름다움을 이룩하였으니,
만년에 조용히 노는 기회 얻으셨네.
그대여, 서린 용이 한 번 일어나면
구주(九州)에 은택 줌을 보지 못하였는가.
삼농(三農)에 고무되어 풍년이 들었네.
돌아와서 물고기와 짝하니, 여의주 안고 깊은 못에 푹 잠드네.
이승소 역시 한명회를 찬양했다. 이조·형조 판서, 좌참찬 등을 지낸 이승소는 당대의 문장가로 예악(禮樂)·음양(陰陽)·율력(律曆)·의약·지리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1457년(세조 3)에 예문관제학이 되어 왕명으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던 이승소는 1474년에 신숙주·강희맹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다.
순례자의 노래 (41)
- 성종, 압구정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철거하라고 명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76년 11월 6일에 성종은 압구정 시(詩)를 지어 상당부원군 한명회에게 내려 주었다.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이다. 한명회의 4녀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1456∽1474)가 성종의 첫 번째 왕비였다. 그녀는 1467년에 자산군과 결혼하여 18세에 흉서(薨逝)했다.)
한명회는 어제시(御製詩)를 판각하여 압구정에 걸어 놓았다. 압구정을 찾는 이들에게 자신이 이처럼 대단한 사람임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이런 처사는 ‘압구(갈매기와 친한)’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1년 후인 1477년(성종 8) 9월 28일에 성종은 권경우·이승소·한명회 등과 시장(詩章)에 대해 논의하였다. ‘성종실록’을 읽어보자.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사간원 정언(正言) 권경우가 아뢰었다. (권경우는 1477년 4월 18일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조숭손의 범죄를 적발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네 계급을 뛰어 올려 주었다.)
"주상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시니, 무릇 시장(詩章)을 짓는 것이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짓자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나,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덕행(德行)은 근본이고 문예는 끝이다.’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풍월정시(風月亭詩)를 지어 월산대군(성종의 형)에게 주시고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지어 한명회에게 주시었는데, 모두 판자(板子)에 새기어 달았습니다.
풍월정은 사람이 보기 어려운 곳이므로 괜찮겠으나, 압구정은 한강(漢江) 곁에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만일 중국 사신이 와서 한강에 놀다가 우연히 이 정자에 올라 어제시(御製詩)를 본다면 반드시 전하께서 뭇 신하와 함께 창화(唱和)한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또 풍속이 숭상하는 것은 임금으로 말미암으므로, 여러 아랫 사람들이 만일 주상께서 사장(詞章)을 좋아하시는 것을 알면 성현의 글은 강하지 않고 장차 오로지 시장을 일삼을 것이니,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용이하게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 아닙니다. (...) 전하께서 지난번에 등왕각서(滕王閣序 중국 강서성에 있는 누각이다. 당고조의 아들 등왕(滕王)이 세웠는데, 왕발이 서문을 지었다)를 써서 한명회에게 주시었는데, 한명회가 곧 판자에 새겼으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찍어 내어 병풍을 만들었으니,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종 : "대군(大君)과 정승(政丞)이 나에게 시를 짓기를 청하기에 나도 또한 뜻을 말하였을 뿐이고, 고려 현종이 문사(文詞) 짓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뭇 신하와 함께 창화(唱和)하는 유(類)는 아니다. 정승이 또한 병풍으로 내 글씨를 청하였는데, 판자에 새긴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아름다운 것을 자랑하고자 하여 한 것이랴?"
이러자 동지사 이승소가 말하였다.
"이 말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창화하는 것이 원래 부덕(不德)한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한결같이 엄하기만 할 수 없기 때문에 선왕이 연향(燕享)의 예(禮)를 제정하여 위아래의 정을 통하였으니, 녹명(鹿鳴 시경(詩經)에 있는 시)등의 시가 그것입니다. 당(唐) 우(虞) 때에도 갱재(賡載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시를 지음)의 노래가 있어, 도유우불(都兪吁咈 도유는 찬성, 우불은 반대의 뜻. 요임금이 군신간의 토론때 쓰인 말) 의 풍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국을 섬기는 나라이니, 문장(文章)이 아니면 그 정을 통할 수가 없습니다. 당태종이 비백서(飛白書 : 팔서체(八書體)의 하나)를 썼는데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취하였으니 글씨 쓰기 좋아하는 것 또한 성덕(聖德)에 누(累)가 될 것이 없습니다."
검토관 성담년 : "대간(臺諫)이 풍운월로(風雲月露 인심(人心)에 조금도 유익하지 않은 화조월석(花朝月夕)만을 읊은 시문 詩文)의 습관이 생길까 염려하는 것은 옳으나, 임금이 사장 짓기를 좋아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시강관 최숙정 : "중국에서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신이 올 때 시부(詩賦)로 서로 창화하여 그 정을 통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장(詩章)이 아니면 비록 예의가 있더라도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사(文詞)는 폐할 수 없습니다."
영사 한명회 : "당(唐) 우(虞) 때에도 갱재(賡載)의 노래가 있었으니, 지금 주상께서 시를 지어 뭇 신하와 창화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이에 권경우가 말했다.
"갱재의 노래는 모두 자연스럽게 발한 것인데,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성종이 마무리 지었다.
"그대(권경우) 말이 옳다. 한갓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고, 한명회에게 현판을 철거하고 또 등왕각서를 도로 들이라고 명하였다.
순례자의 노래 (42)
- 압구정 주인 한명회의 오만방자함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년(성종 12) 6월 초에 중국 사신이 조선에 왔다. 6월 5일과 15일에 성종은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중국 사신에게 연거푸 잔치를 베풀었다.
6월 24일에 상당 부원군 한명회가 와서 아뢰었다.
"중국 사신이 신의 압구정(狎鷗亭)을 구경하려 하는데, 이 정자는 매우 좁으니 말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종은 우승지 노공필에게 명하여 중국 사신에게 가서 "이 정자는 좁아서 유관(遊觀)할 수 없습니다." 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신은 "좁더라도 가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압구정은 중국 사신들이 꼭 보고 싶은 명승지였다. 한림학사 예겸의 ‘압구정기’와 명나라 문사들의 ‘압구정 시’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루 뒤인 6월 25일에 한명회가 와서 아뢰었다.
"내일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고자 하므로, 신이 오늘 아침 중국 사신에게 가보았더니, 중국 사신이 신을 머무르게 하여 주반(晝飯 식사)을 같이하였습니다.
상사(上使)가 말하기를, ‘내가 얼굴에 종기가 나서 낫지 않았으므로, 가지 못할 듯합니다.’ 하기에, 신이 청하기를, ‘나가 놀며 구경하면 병도 나을 것인데, 답답하게 객관(客館)에 오래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제가 가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당 부서에 명하여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대만(大幔)을 치게 하소서." (대만은 커다란 장막으로, 왕이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말한다. 이는 용과 봉의 형상이 새겨진 차일로, 왕만 쓸 수 있는 차일인데 이걸 한명회가 요청한 것이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하였다.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혐의하는가?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 용산구 한남동 한강변 언덕에 지어진 정자)에서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명회가 또 보첨만(補簷幔: 처마에 잇대는 장막)을 청하자, 성종이 전교하였다.
"이미 잔치를 차리지 않기로 하였는데, 또 무엇 때문에 처마에 잇대는가? 지금 큰 가뭄을 당하였으므로 뜻대로 유관(遊觀)할 수 없거니와, 내 생각으로는 이 정자는 헐어 없애야 마땅하다.
중국 사신이 중국에 가서 이 정자의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면, 뒤에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는 사람이 다 유관하려 할 것이니, 이는 폐단이 되는 것이다. 또 강가에 정자를 꾸며서 유관하는 곳으로 삼은 자가 많다 하는데, 나는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내일 제천정에 주봉배(晝捧杯 낮참에 대접하던 술)를 차리고 압구정엔 장막을 치지 말도록 하라."
다시 한명회가 아뢰었다.
"신은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가 본래 숙질(宿疾)이 있는데 이제 또 더쳤으므로, 신이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제천정일지라도 신은 가지 못할 듯합니다."
이러자 성종은 승정원에 전교하였다.
"강가에 정자를 지은 자가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이제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면 반드시 강을 따라 곳곳을 두루 노닐고 난 후에야 그칠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오는 자도 다 이것을 본떠 유람(遊覽)할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喜雨亭)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거둥하였다가 마침 영우(靈雨)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記文)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또 내일은 제천정에서 주봉배(晝捧杯)를 차리고 압구정에는 유관만 하게 하라."
이러자 승지(承旨)들이 아뢰었다.
"한명회의 말은 지극히 무례합니다. 중국 사신이 가서 구경하려 하더라도 아내가 참으로 앓는다면 이것으로 사양해야 할 것인데, 중국 사신이 병이 있다고 말하는데도 도리어 스스로 놀기를 청하고서 한마디도 아내의 병을 말하지 않았고, 이제는 아뢰어서 대만(大幔)과 보첨(補簷)을 청하였으니, 대개 그 사치하고 큰 것을 곡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상의 뜻에 허락하시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서는 말을 바꾸어 아뢰기를, ‘신의 아내가 병이 심하므로 제천정일지라도 가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성상이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을 마음에 언짢게 여겨서 나온 말일 것이며, 마음에 분노를 품어서 언사(言辭)가 공손하지 않았으니, 신하로서의 예의가 아주 없습니다. 유사(攸司)를 시켜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이러자 성종은 "그 말이 매우 옳다. 그러나 천천히 분부하겠다." 고 전교하였다. (성종실록 1481년 6월 25일)
순례자의 노래 (43)
- 성종, 한명회를 국문하라 명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년 6월 26일에 성종은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성종이 좌우에게 물었다.
"내가 듣건대, 재상 중에 강가에 정자를 지은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지금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고자 하거니와, 뒤에 오는 중국 사신도 다 가서 유관(遊觀)한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헐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러자 모두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대신들이 말했다.
영사 노사신 : "국초(國初)에는 신의 할아버지 노간(盧衎) 만이 금천에 있는 농장의 강가에 작은 정자를 지었을 뿐인데 이제는 강가에 정자를 지은 자가 정말 많습니다."
특진관 김자정 : "신이 대간이었을 때에 이미 이 일을 아뢰었습니다. 강가의 정자들은 죄다 헐어 없애야 합니다."
지사 이승소 : "유식한 자가 이 말을 들으면 스스로 헐 것입니다. 어찌 영(令)이 내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성종은 "올해 안에 헐어 없애도록 하라."고 말했다.
사간원 정언(正言) 윤석보가 한명회의 일을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한명회가 중국 사신이 압구정(狎鷗亭)에서 놀고자 한다 하여 장막(帳幕)을 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자 곧 아내가 앓는다고 거짓말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죄 주어야 합니다."
성종 : "정승(政丞)이 잘못하였다. 지난번에 북경(北京)에 갈 땐 아내의 병이 바야흐로 심하여 거의 죽게 되었어도 갔는데, 이제 하루의 일 때문에 아내가 앓는다고 사양하는 것이 옳겠는가?
내가 어진 임금이 아니라고 해도 신하의 도리가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승정원에서 말하기를, ‘한명회가 청한 대로 허락받지 못하였으므로, 분한 마음을 품고 이 말을 한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분한 마음을 품은 듯하다."
윤석보 : "전일 사사로이 진헌(進獻)한 일과 궁각(弓角)에 관한 자문(咨文)의 일에 다 죄가 있는데, 성상께서 모두 용서하였으므로, 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종이 좌우에게 묻자, 모두 ‘한명회가 죄가 있다.’고 말했다. 성종은 한명회를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였다.
이 날의 실록엔 사신(史臣)이 논평이 실려있다.
"당초에 한명회가 북경에 갈 때에 임금이 계칙(戒飭)하기를, ‘혹시라도 정동(鄭同)에게 먼저 통하지 말고 또 궁전(弓箭)을 바치지 말라.’ 하였는데, 한명회가 통주(通州)에 이르러 통사(通事) 장유화를 시켜 먼저 정동에게 알렸고, 사사로이 진헌할 때에 궁전을 바치므로, 부사(副使) 이승소가 말렸으나 한명회가 듣지 않았다.
그 사사로이 바치는 물건을 힘써 풍부하게 하여, 황제의 뜻을 기쁘게 하고 정동의 욕심을 채우고서 상을 많이 받아가지고 돌아와 늘 남에게 자랑하였다. 이 때에 와서 (중국 사신) 정동을 맞아 압구정에서 함께 놀 때에 잔치를 크게 베풀어 뽐내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핵받아서 죄를 받은 것이다." (성종실록 1481년 6월 26일 2번째 기사)
이윽고 한명회가 와서 아뢰었다.
"중국 사신이 압구정을 보고자 하므로 신이 계청(啓請)하여 말리려 하였으나 되지 않았고, 어제 보첨(補簷)을 청한 까닭은 그 정자가 좁기 때문이었으며, 가서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 까닭은 신이 가지 않으면 중국 사신도 가서 구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에서는 신이 분한 마음을 품고서 이렇게 아뢴 것이라고 하니, 신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에 성종이 말했다.
"정승의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 일은 정승이 잘못하였다."
(성종실록 1481년 6월 26일 3번째 기사)
이어서 성종은 사헌부에 한명회를 추국(推鞫)하라고 전지(傳旨)하였다.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이미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유관(遊觀)하고자 하는데, 정자가 좁고 곁에 평평한 땅이 있으니 장막과 보첨(補簷)을 치기를 청합니다.’ 하고서 윤허 받지 못하자, 문득 분한 마음을 일으켜 거짓으로 아내의 병을 핑계하였고, 자제(子弟)를 시켜 아뢰기를, ‘아내의 병이 위독하여 제천정일지라도 결코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무례(無禮)가 막심하다. 추국하여 아뢰라."
(성종실록 1481년 6월 26일 4번째 기사)
순례자의 노래 (44)
- 성종, 한명회의 직첩만 거두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1년 7월 1일에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를 아뢰니, 성종은 어서(御書)를 내렸다. 그 말미(末尾)는 아래와 같다.
"죄는 크나, 여러 조정의 원훈이고 나에게도 구은(舊恩)이 있으니, 다만 직첩(職牒)을 거두고 성밖에 부처(付處 죄인을 거주지를 한정하여 귀양살이 시키는 것)하는 것이 어떠한가? 의정부에 보이라."
영의정 정창손·좌찬성 한계희·우찬성 강희맹이 "한명회는 임금의 장인으로서 정난(靖難)의 큰 공훈이 있으니, 부처를 제감(除減)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는 의견을 냈다.
우의정 홍응·좌참찬 이철견·우참찬 이승소는 성상(聖上)의 하교가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에 성종은 직첩만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좌부승지 이세좌가 아뢰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불경(不敬)에 관계된 일이면 반드시 중죄(重罪)를 주었습니다. 한명회는 불경이 막심한데, 직첩만을 거두는 것은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이러자 성종이 전교하였다.
"외방(外方)에 부처하였다가 중국 사신이 알고서 용서하여 주기를 청하게 되면 처치하기 어려울 것이며, 대간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죄주기를 청하여 허락받고야 말려고 할 것이다. 승지는 다만 출납(出納)할 따름이니, 다시 말할 것 없다.“
7월 2일에 대사헌 조간 등이 와서 아뢰었다.
"신하로서의 죄는 무례한 것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제 한명회의 직첩만을 거두었습니다. 법대로 과단(科斷)하소서. 또 한명회의 죄는 매우 크므로 공훈을 논의할 수 없는데, 정창손은 ‘큰 공훈이 있으므로 부처를 제감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한명회를 감싼 것입니다. 추국(推鞫)하게 하소서."
이러자 성종은 "내가 이미 짐작하여 결단하였고, 꼭 영의정의 의논을 따르지는 않았다."고 전교했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이 함께 상소하였다.
"한명회의 무례한 형적은 말과 낯빛에 나타났으니, 율문(律文)대로 시행하소서. 또 정창손은 임금과 신하의 분별을 헤아리지 않고, 한명회를 감싸려고 그의 공훈을 논하였으므로, 국문하소서."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간이 또 아뢰었다.
"한명회는 친히 중국 사신에게 가서 청하였으므로, 아첨한 것이 심한데, 이제 또 이처럼 무례하였으니, 율문대로 죄를 결단하소서. 또, 정창손은 수상으로서 이렇게 불경한 일을 보았으면 백관을 거느리고 죄주기를 청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편들어서 공훈을 말하였으므로, 죄가 한명회와 같으니 국문하소서.
그러나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어서 이 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명회의 죄를 엄히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신하로서의 죄는 불경(不敬)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한명회는 중국 사신 정동(鄭同)에게 아첨하느라 가만히 맞이하여다가 유관(游觀)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두려워서 겉으로 바라지 않는 체하고 이미 아뢰고서, 또 스스로 가서 청하였으므로 면전에서 속이는 짓을 자행하였으니, 그 불경이 하나입니다.
공가(公家)의 장막을 사제(私第)에 치기를 청하여 권세와 총애를 뽐내어 보이려고 굳이 청하였으니 그 불경이 둘입니다.
윤허받지 못하게 되어서는 문득 분한 마음을 품고 아내가 앓는다고 거짓으로 핑계하여 참석하지 않으려 하였으므로, 횡패(橫悖)하고 무례하였으니 그 불경이 셋입니다.
신하가 세 가지 큰 죄를 지면 죽어도 남는 죄가 있으므로 대소 신료가 모두 분하게 여기는데, 전하께서는 직첩(職牒)만을 거두셨습니다.
대저 법이라는 것은 천하가 함께 하는 것이고, 전하께서 사사롭게 하실 수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 한명회를 사사로이 돌보시더라도 조정의 명분을 훼손하게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과단성 있게 결단하여 신하로서 불경한 죄를 밝히소서."
성종은 "이미 직첩을 거두어 뭇사람을 경계하였고, 죄가 중하기는 하나 공도 큰데, 또 무엇을 더하겠는가?"고 어서를 내렸다.
그러자 대간이 또 차자(箚子)를 올렸다.
"영의정 정창손은 수상으로서 한명회의 불경을 들었으면 백료를 거느리고 죄주기를 청해야 옳은데, 한명회의 공훈이 중하다는 것을 드러내 말하고, 그 죄를 청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구제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한명회가 있는 줄만 알고 전하께서 계시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죄가 같으니 국문하게 하소서."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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