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37)
- 김시습,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을 힐난하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482년경에 김시습은 서강(西江)을 지나다가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에 들렀다.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 1차 아파트 72동 뒤쪽에 압구정 터라는 표석이 있다.)
정자엔 한명회가 지은 시판(詩板)이 붙어 있었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젊어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쳤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백발이 되어선 강호에 누웠노라.
한명회의 시를 본 김시습은 부(扶)를 위(危)로 고치고, 와(臥)를 오(汚)로 고쳐 놓고 떠났다.
靑春危社稷 젊어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더니
白首汚江湖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나중에 한명회는 김시습의 시를 보고 곧바로 자신의 시판을 떼어 버렸다 한다. (허경진 옮김, 매월당 김시습 시선, 평민당, 2019, p 145)
「압구정(狎鷗亭)」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에 나온다. 이를 읽어보자.
【누정】 압구정(狎鷗亭)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가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 1415~1479)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1475년)에 또 사신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등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압구정 주인이다.”하고, 시를 지어 보여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 예겸의 기문에, “(전략) 천순(天順) 1년(1457년) 겨울에 조선의 이조 판서 한명회 공(한명회는 1457년(세조 3년) 8월 14일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 필자 주)이 조선 국왕의 명을 받들고 들어와 봉사(封事)를 천자에게 바치었다. 공은 전에 별장을 한강 가에 두고 정자를 그 가운데 지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다. 내가 이전에 사신으로 조선에 가서 한 차례 놀았으므로 그 좋은 경치를 안다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름을 청하고 기문 쓰기를 부탁하였다. (예겸은 1450년(세종 32) 윤 1월 1일에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며 정인지 ·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며 윤 1월 14일에 한강에서 유람을 즐겼던 인물이다. 「세종실록」에 나온다. - 필자 주)
내 이름 짓기를 압구(狎鷗)라 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자이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닌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찌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조금이라도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올라 공중을 휘 날은 뒤에라야 내려앉는다. 새이면서도 이상한 낌새를 보는 것이 이와 같은 까닭에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바다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수백 마리 내려오면 아무런 낌새가 없는 것으로 여겼고, 갈매기를 붙들어 놓고자 하면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오직 올바른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한명회)은 큰 키가 옥처럼 섰고 거동과 풍도가 빼어나고 위대하여, 번국(藩國 조선)에서 벼슬할 때, 공명하게 인재를 뽑아 쓰고 천조(天朝 중국)에 사신으로 와서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절을 보였으니, 조선에 돌아가면 등용됨이 융숭할 것이어서, 어찌 갈매기와 친할 수 있겠는가? 만물의 정은 반드시 권력을 잡으로려는 욕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욕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 사람들은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고자 할 것이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부귀와 이득 그리고 녹봉에 대하여 자신의 욕심이 없는 것같이 한다면, 이는 도(道)에 다다른 높은 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정자를 압구라 이름함이 아마도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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