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38)
-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狎鷗亭)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의 압구정 기문은 이어진다.
“옛날 송나라 충헌공(忠獻公) 한기(韓琦 1008~1075 : 쓰촨[四川]의 기민(飢民) 190만 명을 구제하고, 서하(西夏)의 침입을 격퇴하여 변경 방비에도 역량을 과시하여 30세에 이미 명성을 떨쳐 추밀부사가 되었다. 이후 재상에 올랐으나 왕안석과 대립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도 일찍이 정자 이름을 압구로 하니, 문충공(文忠公) 구양수(歐陽脩, 1007~ 1072 : 정치가·문장가, 당송팔대가이다)가 시를 지어 보내기를,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한 절개는 금석과 같아, 공훈과 덕이 함께 높아 옛날과 지금도 비치었다. 어찌 기심(機心 교사한 마음)을 잊어 갈매기가 믿는데 그치겠는가. 만물을 다스리는 것도 본래 무심(無心)함이다.’ 하였다. 한기가 시를 얻고 기뻐 말하기를, ‘영숙(永叔 구양수의 자)이 나를 아는구나.’ 하였다.
조선과 중국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사람의 마음은 같고, 고금이 비록 다름이 있으나 우리 도(道)는 다르지 아니하다. 내가 공에게 바라는 것도 자못 이와 같다. 공의 마음에도 역시 나더러 잘 안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혹시 잘 안다고 여기거든 이 말로써 정자 가운데에 걸어 기문으로 삼으면 다행이겠다.”
그런데 한명회는 1475년(성종 6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 그는 명나라의 저명 인사들에게 압구정을 제목으로 한 시를 지어주길 청하여 수십 명으로부터 시를 받았다.
먼저 급사중(給事中) 진가유의 시이다.
정자는 물과 구름 사이에 한결같이 산뜻하고 깨끗한데
정자 밖 강 갈매기는 제멋대로 오가네.
종일 서로 친하여 푸른 물가에 의지하였고,
가끔 가까이 날아와 붉은 난간에 서기도 하네.
서로가 맹세 깊었으니 기심(機心 교사한 마음) 잊은 지 오래고,
공무에서 아침저녁 퇴근하면 정취가 스스로 한가하네.
아직 높은 관직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요즈음엔 명리(名利)와 이미 관계가 없어졌다네.
진가유의 시는 권력과 부를 버리고 한가롭게 물러나 앉아 갈매기와 친하게 어울리는 선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한명회는 과연 그런 사람이었을까?
다음은 급사중 장녕의 시이다.
물과 구름 깊은 곳에 초정(草亭)이 그윽한데,
손님이 있어 기심을 잊어 흰 갈매기를 대하네.
공명(功名)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한가로운 심사(心事) 가지고, 부침(浮沈)하는 것을 배우지 말라.
무정후(武靖侯) 조보의 시이다.
그윽한 정자 높이 큰 강 동쪽을 굽어보는데,
갈매기와 서로 기심을 잊어 즐거움이 다함 없네.
떴다 잠겼다 함이 때가 있음에 둥둥 제대로 맡기고,
오고감에 스스로 걱정하는 생각이 없네.
병부 상서(兵部尙書) 항충의 시이다.
외로운 정자 푸른 물가에 흰 갈매기와 벗이 되네.
벼슬살이는 꿈과 같으매 한가한 마음은 마치 구름 같네.
물결 빛은 대자리 빛을 밝게 하고, 연꽃 기운은 향로의 향기와 섞였네. 해옹(海翁)에게 말을 전하고자 하니, 기심(교사한 마음) 잊은 것은 이분에게 돌려보내소.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등소의 시이다.
작은 정자를 새로 낚시터 곁에 짓고,
매양 떼지어 나는 갈매기를 사랑하여 앉아서 돌아가지 아니하네.
잔물결, 가벼운 바람에 둥둥 뜨고,
외로운 부평초와 나무토막처럼 스스로 떠다니네.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형연의 시이다.
새로 모정(茅亭)을 푸른 강 가까이 지으니,
들 갈매기 오고가매 뜻이 더욱 깊네.
항상 작은 배에 의지하여 낚시 드리움을 보고,
때로는 그윽한 창에 가까이 와서 거문고 타는 소리 듣네.
한림수찬(翰林修撰) 나경의 시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기심잊은 사람은 일찍이 기심 잊은 새를 사랑한다.’ 하였네.
사람과 새가 아침저녁으로 좋은 맹약을 맺었네.
여기에다 이 정자를 지으니 높다랗게 강가에 임했네.
맑고 깨끗함이 침향(沈香) 아니랴! 경치는 하늘의 조화를 이루었네.
(한국 고전번역원 사이트, 한국고전 종합 DB,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경기도 광주목)
이외에도 명나라 명사들의 시가 다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한편 1475년 6월 5일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좌의정 한명회는 《신증강목통감(新增綱目通鑑)》·《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요사(遼史)》·《금사(金史)》·구양수(歐陽脩)의 《문충공집(文忠公集)》 각 1질(帙)과 중국 조정의 문사(文士)가 압구정(押鷗亭)과 화답한 시축(詩軸 시를 적은 두루말이)등을 올렸다. (성종실록 1475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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