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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5 독립협회 회원 구속과 서재필 추방

5 독립협회 회원 구속과 서재필 추방

 

# 독립협회 회원 구속

 

만민공동회 개최에 경악한 고종은 즉시 견제에 나섰다. 315일에 고종은 특명을 내려 독립협회 회원 지석영, 이원긍, 여규형, 안기중을 구속시켰다.

 

지석영 등 4명이 구속되자 320일에 독립협회는 항의 투쟁을 하였지만, 고종은 선동죄를 적용하여 이들을 10년간 유배보냈다.

 

이러자 독립협회는 특별회와 토론회를 잇달아 열어 정부의 횡포를 거세게 규탄하고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 투쟁을 벌였다. 결국 628일에 고종은 유배된 죄인 지석영 등 4명을 특별 방송(放送)했다.

 

# 서재필 추방

 

1898514일에 고종과 수구파 정부는 독립협회 지도자 서재필(18641951)을 추방했다. 18951226일에 귀국한 지 25개월 만이었다.

 

18964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초반에는 정부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후 서재필은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했다.

 

부패사례를 살펴보자. 1896917일 자 독립신문논설에는 내부대신이 새로 임명된 거창군수 김봉수를 만나 어떻게 자네가 고을 원님이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3만냥을 주고 고을 원님 벼슬을 샀다고 대답했다가 파면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정부 비판이 거세지자 고종은 서재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18971213일에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미국 공사 알렌과 담판했다. 그는 알렌에게 정부를 비난하는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알렌은 서재필이 미국인임을 강조하고 중추원 고문 계약기간 10년 중 남은 기간의 급료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지급하지 않고는 해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러시아 공사 스페에르는 서재필을 추방하라고 고종에게 압박을 가했고, 일본도 서재필 추방에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1898425일에 서재필과 정부 사이의 교섭이 미국 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타결됐다. 정부는 서재필 출국 조건으로 서재필과 계약한 10년 중 잔여기간 710개월의 급여 등을 지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514일에 서재필은 미국인 부인과 맏딸을 데리고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재필은 떠났어도 독립협회 활동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자주독립, 외세 배격, 민권 보장의 목소리는 더욱 거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