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만민공동회
1897년 10월에 러시아는 재정고문으로 알렉셰프를 파견하고 12월에는 한러은행을 설립하는 조치를 취했다. 1898년 1월 초에 러시아 군함이 부산에 입항했고, 수병들은 절영도(지금의 영도)에 상륙하였다. 해군 제독 두바소프는 절영도에 석탄고 기지 설치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2월 16일에 임명된 외부대신 서리 민종묵은 절영도 조차와 한러은행 허가를 의정부의 의견도 거치지 않고 단독 처리했다. 의정부가 문제를 제기하자 3월 2일에 고종은 민종묵을 면직시켰다. 하지만 다음날인 3월 3일에 고종은 다시 그를 외부 대신에 임명하였다. 고종, 너무나 황당하다.
한편 1897년 5월에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 추진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이름하고 8월 29일부터 매주 토론회를 개최했다.
1898년 2월 13일의 제21회 토론회에서는 ‘구국 선언상소’를 결정했다.
3월 7일에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회수와 한러은행 철수를 요구하는 항의문을 정부에 보냈다. 3월 10일에는 서울 종로에서 민회(民會)가 열렸다. 민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당시 서울 인구 19만 6천 명의 5%가 모인 것이다. ‘원조 촛불’이라고 불리는 이 집회는 ‘글이 아닌 말로 하는 정치참여’ 길을 열었고, 민중과 연사가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했다. 모임은 당초엔 ‘민회(民會)’라 했으나 만 명이나 모이자 ‘만민공동회’라 불렸다.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 철회와 한러은행 철수, 그리고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 고문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러자 고종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는데, 원로의 자문과 내각 회의를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냈다. 이 시기 러시아는 한반도보다도 만주 경영이 급선무라 여겼기에 한반도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4일에 고종은 탁지부 재정고문과 러시아 교관들을 파면하였고, 한러은행도 문을 닫았다.
4월 12일에 러시아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시키고 주한 러시아 공사도 스페이르에서 마튜닌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한반도 후퇴가 독립협회의 반대 때문이었을까. 이는 독립협회 활동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러시아의 철수는 러시아의 관심이 조선에서 만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문형 지음,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2001, 250-251)
1898년 4월 25일에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 로젠과 일본 외무대신 니시 로쿠지로는 도쿄에서 ‘로젠-니시 협정’을 맺었다. 이를 살펴보자.
1. 양국 정부는 조선의 주권과 독립을 확인하고 일체의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
2. 조선이 양국 중 어느 국가에 조력을 요청하는 경우는 서로 협상하여 처리한다. 군사교관이나 재정고문 임명은 상호 협상하지 않고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
3.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의 상업과 공업의 기업이 크게 발달한 사실과 일본 거류민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상업상· 공업상의 관계가 발전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처럼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했다. 러시아가 일본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898년 3월 러시아의 뤼순 · 다렌 조차로 인해 영국과 미국등 열강의 적개심을 달래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시 후퇴하였지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당사자인 대한제국은 또 소외되었다. 번번이 ‘코리아 패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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