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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망했나 부패망국

2. 대한제국의 탄생

2. 대한제국의 탄생

 

아관파천 시기의 키워드는 독립이었다. 18951226일에 서재필(1864~1951)11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했다.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된 미국 국적의 서재필은 18964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고종의 밀사인 미국인 헐버트의 평가를 읽어보자.

 

“189647일에 서재필 박사에 의해 처음으로 외국어 신문이 창간됐다. 그 신문의 이름은 The Independent였으며 일부는 한글로 인쇄됐다. 처음부터 그 신문은 한인들 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독립협회가 조직되도록 만든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됐다.” (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p189, 192)

 

독립신문은 발행 초기에 정부의 시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가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며 국민계몽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고종과 정동파 내각 그리고 서재필은 모처럼 밀월관계였다.

 

72일에는 독립협회가 창립되었고, 1121일에 독립협회는 서대문에 있는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했다.

 

한편 375일간 아관파천(俄館播遷)한 고종은 열강들에게 각종 이권을 빼앗긴 후, 1897220일 영국·미국·러시아 공관들이 근처에 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1897816일에 고종은 연호를 광무(光武)로 지었다. 광무(光武)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힘을 기르고 나라를 빛내자.”는 의미였다.

 

이어서 고종은 황제 존호를 아홉 번 사양 끝에 마침내 받아들이고, 1012일에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하였다.(환구단은 원래 중국 사신의 숙소인 남별궁 터인데 현재는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이다.)

 

황제는 이제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은 제후국의 왕이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책봉을 받은 천자였다.

 

13일에 고종 황제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반포하였다. 마한· 진한 · 변한의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큰 한()’이란 뜻에서 대한(大韓)’이라 한 것이다. 이제 대한제국은 중국과 대등한 자격을 갖춘 독립국가가 되었다.

 

대한제국 탄생 이후 가장 먼저 치른 국가적 행사는 1121일에 있었던 명성황후 국장(國葬)이었다. 장례는 왕후가 1895108일에 경복궁에서 시해된 지 21개월 후에 이루어졌다. 장지는 서울 청량리 밖 홍릉이었다.

 

국장(國葬)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비는 쌀로는 44,300여 섬 규모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10억 원에 달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p 106)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깃값만 해도 6만 냥이 들고 상여꾼에게 호궤한 비용이 62천여 냥, 상여꾼은 7천 명, 등룡(燈籠)은 관례로 준비한 이외에 추가로 1,100쌍을 더 진열하였으며, 다른 비용도 이와 상당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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